비단에 채색한 선암사 서부도전 감로탱. 1736년 화가 승려 의겸이 그린 걸작으로 18세기 감로탱의 전형을 보여준다. 주홍, 청색, 녹색 등을 입힌 깔끔한 화면 위에 천상, 제단, 속세의 모습이 단정한 삼단 구도로 자리잡고 있다.
통도사 성보박물관 ‘감로탱’ 전
‘인간의 삶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다’ 무덤 속 널길 같은 2층 전시장의 들머리 벽에 이런 구절이 적혀있다. 누구나 알지만 잊어버린 척하는 삶의 화두가 머리를 때린다. 더 안쪽의 계단 통로로 올라서니 눈길은 더욱 심란해진다. 화재나 붕괴, 자연재해와 전쟁 등으로 비명횡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불화 속 이미지들이 삼풍백화점 붕괴, 지하철 방화 같은 신문기사들과 한데 뒤섞인 패널 그림으로 옮겨져 양벽에 그득이 걸렸다. 죽은 이 극락왕생 발원
천도재·수륙재때 사용
조선시대에만 제작 조선시대 민중과 친숙했던 풍속 불화 감로탱을 모은 경남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의 특별전(28일까지)을 보려면 이 들머리 통로를 먼저 지나야 한다. 기획자가 삶과 죽음, 기쁨과 성냄, 슬픔과 즐거움 따위는 시공을 초월해 되풀이된다는 진리를 굳이 주지시키는 까닭은 무엇일까. 두개의 큰 전시실 곳곳에 걸린 23점의 걸작 감로탱들이 바로 이 희로애락에 얽힌 아우성을 담고있는 까닭일 것이다. 16~20세기 오직 조선에서만 그려진 감로탱은 희로애락과 죽음의 공포에 몸부림치는 중생의 구원을 비는 의식용 불화다. 망자들의 극락왕생을 비는 천도재나 수륙재 때 원혼들에게 감로와 같은 법을 베풀어 해탈하게 해달라는 뜻으로 그려졌다. 음식과 종이지물이 가득 차려진 중앙부 제단을 중심으로 윗쪽에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의 천상세계, 아랫쪽에 인간세상의 풍속 요지경이 펼쳐지며 제단 밑에 중생을 상징하는 배고픈 아귀상이 크게 그려진다. 한마디로 제상에 놓인 맛난 음식에 천상 부처의 법력을 입혀 중생의 상징인 아귀에게 베푸는 줄거리인 것이다. 관장 범하 스님은 한점도 보기 어려운 감로탱을 전국의 사찰을 수소문해 20점 이상 한자리에 모았다. 그 열정 덕분에 민중들의 삶 속에 스며든 토착 불교미술의 질박한 매력과 시대상, 지역별로 달라진 감로탱 풍속그림의 변천상까지 조망할 수 있었다. 감로탱 아랫쪽에 있는 각종 재난장면들과 민중들의 풍속과 생활 모습은 전시의 고갱이다. 국내 최고의 감로탱인 17세기 초의 보석사 불화는 임진왜란 당시 조총을 든 왜군들과 우리 관군의 전투장면을 담고 있어 당시 의병들에 대한 추모 열기를 보여준다. 18세기 초의 해인사 감로탱은 눈에 익은 조선중기 김식의 물소 그림 양식 등이 하단의 풍속도 사이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고대박물관 소장품에는 목욕 장면 같은 궁중 생활상과 청나라 사신을 맞는 모습 등도 표현되어 있고, 신윤복 그림에 나오는 무녀의 의식모습까지 등장한다. 외계인처럼 희꾸무레한 윤곽의 원혼들 모습을 실루엣처럼 그려넣은 운흥사 감로탱은 마치 애니메이션 같다. 일제말 39년 만들어진 서울 흥천사 감로탱은 전신주 공사를 하는 인부, 교복 입고 싸우는 학생들, 근대건축물의 모습까지 등장해 시대상과 감로탱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이어져왔음을 한눈에 드러낸다. 아예 제단이 사라지고 온통 붉고 누른 빛 속에 감로수를 받아먹는 희끄무레한 정령들의 모습이 나오는 성주사 감로탱은 절절했을 당대 민중들의 불심을 짐작하게 한다. 아귀 머리 형상을 지닌 지옥문을 하단에 그린 우학문화재단 소장의 17세기 말 감로탱, 시장판 모습을 담은 불암사 감로탱, 고고한 색감의 경북대 박물관 소장 미니 감로탱의 발굴도 놓칠 수 없었다. 흥미롭게도 그림 배경으로 등장하는 산수표현은 조선 초중기의 관념적인 중국풍 형식에서 18~19세기로 갈수록 진경산수풍의 사실적 표현으로 변해간다. 눈에 익은 <별주부>전의 거북이와 토끼상, 초기 안견풍 산수도에서 나오는 소나무 두 개 달린 언덕, 민화적 호랑이 등을 볼 수 있다. 전란과 수탈로 곤궁한 삶을 살았던 조선 민중들의 희로애락을 표현된 감로탱은 지금도 우리 인생살이의 자화상이다. 속세의 삶을 우주적 지평으로 확대시킬 수 있었던 옛 불교장인들의 이미지 상상력 앞에서 지금 옹졸한 일상을 되새겨보게 된다. 전시장 패널 한 구석에 붙은 한 글귀는 전시가 남기는 깊은 울림이라 할 수 있다. ‘그대는 바르게 살고 있는가. 그리고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가.’ (055)382-1001. 양산/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사진 제공 통도사 성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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