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접어든 한국 현대미술이 세계 미술계에 대거리할 수 있는 자기 언어는 무엇일까. 오직 우리 미술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장은? ‘젊은 중견’으로 꼽히는 김홍석(41), 배영환(38), 박찬경(40)씨는 그 질문에 작품으로 답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작가들이다. 비엔날레와 대안공간 등에서 주로 활동해온 그들은 회화, 영상, 설치, 사진 등을 통해 우리 미술의 민감한 화두인 근대성과 분단, 세계화의 문제를 일관되게 천착해왔다. 세 작가가 거의 비슷한 시점에 근작전을 차렸다. 서울 청담동 카이스 갤러리에서 진행중인 김씨의 ‘이웃집 아내’전(30일까지·02-511-0668)과 서울 관훈동 대안공간 풀에서 열리고 있는 배씨의 ‘남자의 길’전(11일까지·02-735-4805), 홍대앞 쌈지스페이스에 차려진 박씨의 ‘비행-Flying’전(15일까지·02-3142-1693~4)이다. 젊은 작가의 꼬리표를 떼어야 할 예비 중견들의 고민이 엿보이는 세 전시 마당은 우선 미술의 두 뼈대인 내용과 형식에 대해 제각기 판이한 접근 방식을 설정하고 있다. 김홍석씨 ‘이웃집 아내’ 전 - 국가 권위 ‘별’ 을 갖고 놀다 ‘이웃집 아내’전은 국가적 권위나 신화를 상징하는 만국 공통의 기호인 별을 화두로 삼은 점이 흥미롭다. 볼펜으로 끄적거린 ‘왕별’을 확대해 찍거나 뤽 투이만스, 오로츠코, 허스트 등 해외 유명작가의 그림, 사진들을 다시 찍은 복제 사진들에서 기존 사물의 개념이나 상징은 뒤틀리고 매우 낯선 형상으로 돌변한다. 세계 현대미술계의 화두인 소통의 문제를 색다른 조형물이나 설치작업으로 표현해온 작가적 이력은 2차원 별의 형상을 360도 회전해 선술집 테이블처럼 만든 3차원 별이나 제3세계 외국인 근로자의 미국, 북한, 일본, 러시아 국가 모창 영상에서도 드러난다. 미술시장에서 사족을 못쓰는 오리지널 개념에 대해 철저히 딴지를 거는 작업들은 냉소적이면서도 현대미술의 형식개념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표현하고 있다. 배영환씨 ‘남자의 길’ 전 - 버려진 재료로 ‘소외’ 를 쓰다
반면 배씨는 소외란 화두 아래 문학적 서사가 깃든 설치작업들을 보여준다. 유행가 연작들을 통해 70~80년대 한국사회에서 소외된 룸펜 남성들의 감수성을 표현해온 그는 ‘남자의 길’전에서 도시거리에 버려진 나무판들을 주워 12개의 모조기타 오케스트라를 일일이 만들었다. 버려진 70~80년대 나전 화장대를 해체해 만든 쌍기타 조형물 <완전한 사랑>과 뒷면에 페인트칠 자국과 긁힌 흔적이 드러나는 여러 기타들의 군상, 그리고 이들 재료들의 버려진 모습을 담은 사진들은 죽은 물건들의 슬픈 역사를 소설처럼 드러내는 동시에 소외된 당대 남성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소외의 문제를 가장 심도깊게 파고든 작업들”이라는 작가 김홍석씨의 극찬대로 전시장에는 압축성장으로 상징되는 근대화 시기의 뼈아픈 회한과 애조가 가득하다. 박찬경씨 ‘비행-Flyings’ 전 - 분단의 단면을 내려다보다
미술비평가로도 활약해온 박씨의 전시 작품들은 한반도에 내린 저주인 분단의 단면을 지적인 다큐멘터리로 뜯어보았다. 대표작인 <비행>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남쪽 대표단이 탄 비행기가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기까지의 방송 영상물을 매우 느린 속도로 틀면서 헐벗은 북한 산하와 사람들의 이미지 자체로 분단의 벽을 이야기한다. 작곡가 윤이상의 ‘더블 콘체르토’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영상으로 잡힌 북한의 농민들과 공항 활주로에 도열한 군인들의 뒷모습, 환영꽃술을 흔드는 환영인파의 기묘한 모습들은 작가의 시선에 따라 일상의 이미지가 얼마나 큰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지를 웅변한다. 김씨와 배씨는 지난해 베니스비엔날레에 함께 출품한 절친한 동료이며, 박씨는 김씨와 서울대 미대 선후배 사이다. 또 배씨와 진보 진영에서 함께 미술운동을 펼쳐온 박씨는 이번 배씨의 전시에 서문을 써주기도 했다. 이들 앞에는 한국 미술판에서 작가 활동의 고비라는 40대의 벽, 미술시장 진입이라는 버거운 과제들이 놓여있다. 컴컴한 동굴을 지날 수도, 작가인생의 황금기가 될 수도 있을 그들의 40대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 것인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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