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대고려전’
최고 명품 목조각 ‘스승’ 희랑대사상 옆
북에 있는 ‘제자’ 태조 왕건상 자리 비워
“남북 합의 이뤄져 작품 꼭 오기를 기대”
금속표주박병·아미타여래도·청자 등
전세계 흩어진 보물 450여점 전시
4부로 나눠 고려의 시공간으로 초대
최고 명품 목조각 ‘스승’ 희랑대사상 옆
북에 있는 ‘제자’ 태조 왕건상 자리 비워
“남북 합의 이뤄져 작품 꼭 오기를 기대”
금속표주박병·아미타여래도·청자 등
전세계 흩어진 보물 450여점 전시
4부로 나눠 고려의 시공간으로 초대
10~14세기 고려인들은 21세기 한국인과 놀라울 만큼 닮았다.
재력과 권세를 갖춘 귀족들은 명품을 국외에서 ‘직구’하며 감상했다. 중국과 서역의 관리와 상인들이 자유롭게 도읍 개경의 저잣거리를 거닐며 어울렸고, 유학과 교역도 성해 숱한 외국 교민들이 활약했다. 지금 우리가 거리와 광장에서 응원과 ‘떼창’을 하듯 민중은 팔관회·연등회 등의 축제에서 집단여흥을 즐겼다. 오늘날 반도체처럼 청자와 금속공예품의 상감, 타출, 은입사 같은 당대 첨단기술의 개발에도 국가적 역량을 집중시켜 숱한 성과를 올렸다.
4일부터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이런 고려인들의 삶과 문화가 당대 명품들의 성찬을 통해 한껏 펼쳐지고 있다. 고려 건국 1100돌을 맞아 박물관 학예실이 지난 2년간 모든 역량을 쏟아부으며 준비한 특별전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내년 3월3일까지)의 무대다.
전시는 한반도 역사상 첫 통일국가를 일궈내며 이 땅의 역대 왕조 가운데 세계사에 가장 도드라진 자취를 아로새겼던 고려의 시공간으로 들어간다. 일본, 미국 등 4개국 11개 기관과 국내 34개 기관의 고려 명품 450여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박물관 역사상 최대규모의 기획전인데, 명품들을 나열하며 덩치를 내세운 잔치가 아니라 한편의 다큐드라마 얼개를 지녔다는 점을 특기할 만하다.
정명희 학예연구관을 비롯한 미술부 기획진은 외침과 국난극복, 호국불교 등의 판 박힌 역사 해석과 명품에 얽힌 상투적인 시각을 피했다. 미술품과 생활유물들의 내력 자체에 집중하며 ‘이야기책 같은 고려사’를 구상했다. 그 결과 4부로 짠 전시장에선 현세의 물질적 감각에 충실했던 현실주의자 고려인의 면모를 여실히 만나게 된다. 더불어 불경 구절을 입으로 염송하고 손으로는 정성껏 베껴 적으며 부처와 보살들을 세계 최고의 그림으로 옮겨냈던 독실한 신앙인의 내면과 당대 세계 최고수준의 예술품을 구현했던 장인들의 치열한 도전 흔적들도 눈에 들어온다. 우리 시대와 통하면서도 조선시대 유교문화에 묻혀 단절된 것처럼 보였던 고려의 개방적이고 활달한 문화적 유전자를 새삼 확인하게 되는 자리다. 더욱이 올해 남북화해 분위기를 타고 북한의 고려 명품인 태조 왕건상과 고려 궁터 만월대 출토 금속활자 등까지 출품 후보 목록에 오르면서 전시는 더욱 다채로운 사연들을 품게 됐다.
■ ’코앞의 고려‘, 그 시절 일상 속으로 서막을 여는 1부 ‘고려의 수도 개경’ 들머리에서는 개경 근처에서 출토된 이슬람풍의 유리 주전자와 북방민족의 가죽 주머니를 본뜬 청자 주전자가 등장해 고려 문화의 개방성을 증명한다. 이슬람 의식의 성수를 담는 병과 유사한 유리 주전자는 ‘쌍화점’ 같은 고려가요로 알려진 이슬람인들의 활동상을 실증한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삼한을 통일하며 천자국을 자칭했던 고려의 자주적 의식을 보여주는 <삼국사기> <제왕운기> 등의 기록과 고려 국호가 기록된 지도를 지나면 독립진열실에 마련된 전시의 최고 명품인 희랑대사상의 자태를 만나게 된다. 화엄학의 대가로 10세기 해인사를 중흥시키며 태조 왕건의 정신적 스승이 됐던 대사의 사실적인 건칠 목조각상은 국내 유일의 고대 초상 조각. 한없이 자애롭고 부드러운 표정을 짓지만 강직한 분위기가 감도는 상은 내면의 기운이 전해지는 조선시대 극사실적 초상화 못지않은 ‘전신사조’傳神寫照)의 표현이 잊지 못할 감흥을 남긴다. 특히 상의 옆자리에는 그의 제자인 태조 왕건의 개성 출토 좌상이 놓일 빈 좌대가 나란히 만들어졌다. 북한 쪽과 협의가 안 돼 개막전 출품은 좌절됐지만, 전시 도중에라도 반드시 오길 기다리겠다는 박물관의 뜻을 담았다고 한다. 지화장 정명스님의 연꽃 설치작품을 대신 올려놓은 빈 좌대는 희랑대사상과 함께 나란히 비치면서 남북분단의 현실을 색다른 공간의 미학으로 체감하게 한다.
그 뒤편 ‘왕실 미술’에서는 바로 코앞에 진열장을 밀착 배치한 공예 명품들의 행렬이 압권이다. 미국 보스턴박물관이 소장한 ‘은제 금도금 주자(주전자)를 비롯해 은제 잔 갖춤 등의 호화로운 금속공예품과 청자어룡주자 등 연회에 쓰였음 직한 명품들이 보인다. 몸체를 대나무 모양으로 만든 은제 주전자의 화려한 자태와 점토 광물 중 하나인 녹니석(綠泥石)을 다듬은 왕실 예기 그릇 등의 정교한 만듦새는 탄성을 일으킨다.
■ 볼륨감 넘치는 불교예술의 공간 2부 ‘고려사찰로 가는 길’은 간송컬렉션에서 30년 만에 내놓은 금동삼존불감의 은은한 자태를 보면서 사찰 안 광장과 회랑을 지나는 듯한 동선으로 구성된다. 들머리에서는 신앙 대상을 넘어 당대 동아시아 지식과 소통의 보고 구실을 했던 해인사 고려대장경판들이 선연한 모습으로 먼저 다가온다. 11세기 국내 최고의 화엄경 경판과 역대 삼국과 중국의 제왕 연표 등 처음 보는 희귀경판들의 세부에 눈길을 줄만 하다.
그 다음은 절집 안 큰 마당 같은 공간이다. 매달린 숯덩이로 사찰 인왕문 공간을 재현한 박선기 작가의 설치작품을 지나쳐 나오는 홀(광장)에서는 미남불로 이름 높은 장곡사 금동여래좌상과 최근 복원 수리를 마친 건칠보살좌상, 대승사 좌상 등의 묵직한 고려 불상 5분을 만나게 된다. 이 공간을 중심으로 고려와 중국, 일본, 서역의 불상과 불화들이 꿈결처럼 줄줄이 이어진다. 특히 이탈리아 동양예술박물관의 소장품 <아미타여래도>는 깊고 그윽한 시선과 우아한 몸체 묘사 등이 환상적인 존재감을 내뿜는다.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이 중국 둔황 장경동에서 가져온 고려 불화의 원형이라는 10세기 <수월관음도>와 고려의 <수월관음도>도 한자리에 놓여 앞으로 두번 다시 없을 비교 감상의 기쁨을 안겨준다. 이어지는 회랑 통로에서는 장곡사 불상 복장 속에 들어있던 10m가 넘는 당대 신도들의 발원문이 장대하게 펼쳐진다. ‘내세에는 남자로 태어나게 해달라’ ‘2살 아이의 장수를 기원한다’는 발원 글씨와 ‘바얀테무르’ 등의 몽골식 이름 등에서 당대 사람들의 마음속을 읽는 타임머신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너무나 많은 명품의 행렬 앞에서 지친 관객들은 전시장 말미에 고려의 절집 카페였던 3부 ‘차가 있는 공간 다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의자에 앉아 실제로 풍기는 차향기와 자연의 풍경, 소리들을 고려의 찻집 풍경들을 체험하게 된다.
■ 치열한 도전이 빚어낸 아름다움 4부 ‘고려의 찬란한 기술과 디자인’은 고려의 첨단기술을 얻기 위한 도전의 흔적들을 엿보는 마당이다. 타출, 은입사, 상감, 적동 기법 등 고려의 청자와 금속공예품에 부려 넣었던 여러 뛰어난 기법들을 감상하게 된다. 청자 상감 위에 다시 금을 입혀 금채를 하거나, 세밀하게 두들기며 문양을 만들어 표주박 병과 받침 고리를 만드는 고려인들의 기술력을 실감할 수 있다. 특히 기획진은 전시를 통해 용도가 명확치 않았던 타출 기법의 금속 고리가 금속표주박병에 딱 끼워지는 받침대라는 것을 밝혀내는 성과도 얻었다. 마지막 에필로그는 남한에 유일하게 전하는 고려 금속활자 ‘복’자와 조선시대 초기의 한글 금속활자들을 선보이면서 시대를 넘나들어 전해지는 고려의 문화적 역량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 이제 온전한 만남이 남았다 박물관은 올해초부터 고려 도읍지였던 북한 개성의 왕건상 등 관련 유물의 출품을 추진해왔다. 특히 지난 4월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 쪽에 왕건상과 만월대 출토 금속활자를 비롯한 고려 유물의 전시 대여를 요청하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협조를 약속함으로써 ‘대고려’전 출품은 기대를 모으며 순항하는듯 했다. 하지만, 최근 북미간 대화 정체로 북한 박물관 관계자와의 실무협의가 성사되지 않으면서 고려 유물들의 개막전 전시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배기동 박물관장과 기획진은 고민 끝에 왕건상의 왕림을 기다리며 독립 전시장의 희랑대사상 옆 자리를 일부러 비워두는 전시 구성을 택했다. 현재 남북간에 진행중인 정치적 협상의 성과에 따라 전시의 내용이 가변적으로 달라지는 파격적인 큐레이션을 벌인 셈이다.
이런 비움의 전시는 국내는 물론 국외의 박물관·미술관 전시에서도 유례를 찾기가 어렵다. 영국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경우 사방의 좌대들 가운데 북서쪽 좌대를 비워놓고 1~2년마다 공공미술 화제작을 설치하는 ‘네번째 좌대’ 프로젝트를 1999년부터 벌이면서 세계 미술계의 화제를 모았지만, ‘대고려’전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배 관장은 “통일국가를 이룩한 고려의 역사적 지향성은 분단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전시기간 중이라도 남북 합의가 이뤄져 작품이 오기를 고대한다”고 말했다. 문화재동네 한켠에서는 문화유산 전시가 다분히 현실정치 맥락으로 해석되는데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하지만, 박물관 내부 관계자들은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성사될 경우 왕건상이 답방 선물로 따라붙으면서 전시의 의미가 더욱 커질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는 분위기다. 분단의 정치적 현실과 사실상 연동된 대고려전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생성’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셈이다. 연말 또는 내년초 전시장에서 과연 고려를 온전히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그 결말을 지켜볼 일이 남았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도판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대고려…’전의 대표적 명품으로 꼽히는 희랑대사상. 이 상 안쪽 너머로 개막 전시에 나란히 출품을 추진하다 좌절된 북한 개성 출토품인 태조 왕건상의 빈 좌대(연꽃 모양)가 보인다. 빈 자리엔 지화장 정명스님이 연꽃 모양의 설치작품을 놓았다.
고려불화의 최고 명품중 하나인 <아미타여래도>. 푸른 연꽃 위에 홀로 선 아미타여래의 고결한 자태를 담고있다. 깊은 시선과 은은한 선묘가 단연 돋보이는 걸작이다. 이탈리아 동양예술박물관 소장품으로 원래 중국불화로 알려졌다가 2012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사 결과 고려불화란 사실이 밝혀졌다.
간송문화재단이 소장한 11~12세기의 금동삼존불감. 30여년만에 처음 공개되는 명품이다.
충남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한국 불상조각들 가운데서 최고의 미남불로 꼽히는 수작으로 박물관 전시에 처음 나왔다.
‘대고려…’전의 금속공예 명품으로 꼽히는 은제 금도금 표주박 모양 병. 타출기법의 최고 정점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특별전 포스터에도 대표 이미지로 등장한다.
고려 금동11면 천수관음보살좌상. 박물관이 이번에 보존처리를 마치고 공개한 작품이다. 머리부분에 관음상 11구의 얼굴상이 온전하게 표현된 유일한 사례다.
비색이 돋보이는 참외 모양의 고려 청자 주전자와 받침. 12세기 것으로 영국 피츠윌리엄박물관 소장품이다. 참외 모양 주전자와 받침이 온전하게 갖춤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어 더욱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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