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조의 ‘불꽃’이 실린 <골든 포크 앨범Vol.12> 커버.
한국팝의사건·사고60년 (31) 국제가요제 출전곡과 금지곡 행진
‘국제가요제’라는 말은 요즘 거의 사어(死語)가 되어 버렸지만 1970년대는 그렇지 않았다. ‘아바’가 유러비전 송 컨테스트에서 ‘워터루’로 입상해 세계적 스타로 뜬 것이 1974년이니 말이다. 그런데 동아시아권에서는?
“왜 정미조 양의 ‘불꽃’은 동경의 비 내리는 15일 밤 부도깡 홀에서 비실비실 꺼지고 말았는가”(<일간스포츠> 1975년 11일 26일치) 1975년 11월에 열린 제 6회 ‘동경가요제’(정식 명칭은 ‘세계가요제’)에 대한 보도다. 당시 한국 대표로 출전했던 곡은 송창식이 작사·작곡하고 정미조가 노래한 ‘불꽃’이었다. 같은 해 정훈희가 ‘칠레가요제’에 출전해 ‘무인도’(이봉조 작곡)를 불러 3위를 차지한 것이나 1974년 동경가요제에서 패티 김이 ‘사랑은 영원히’(길옥윤 작곡)로 동상을 차지한 것으로 만족한 것보다 좋지 않은 성적이었다. 후문으로 패티 김은 자신이 ‘동상’에 머문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음악이 스포츠도 아닐 텐데 말이다.
당시에는 국제가요제에서 거둔 성적이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에서 거둔 성적처럼 인식되던 때였다. ‘국위선양’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성적이 좋지 않았음에도 별다른 뉘우침이 없는 스태프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한국팀의 업저버였던 나현구 씨(오리엔트 프로덕션)의 경우 리허설이 진행 중인 부도깡(武道館) 홀의 위켠에 풍채 좋은 자세로 점잖게 팔짱을 끼고 앉아 있다 보니 오가는 참가자들은 그를 심사위원 쯤으로 알았는지 정중한 인사를 해 올 정도였다.” 청춘의 우상들을 레코딩 아티스트로 길러낸 ‘음반업계의 전설’인 나현구 사장에 대한 비난은 불길한 징조같기만 하다.
한 달 뒤인 1975년 12월 ‘불꽃’은 ‘방송부적격’이라는 애매모호한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국제가요제에 ‘국가대표’로 출전했던 곡을 금지곡으로 지정하는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 못지 않게 황당한 일이 있었다. 다름 아니라 ‘불꽃’의 작곡가인 송창식이 겪은 일이다. 그는 동경가요제에 ‘불꽃’을 출품하기 전인 11월 1일 문화방송의 ‘가수왕’에 등극하는 영예를 누렸다(그때는 가수왕을 일찌감치 뽑았다). 그렇지만 이 해 최고의 히트곡이라고 할 만한 ‘왜 불러’는 그가 가수왕에 오른 뒤 금지곡 리스트에 추가되고 말았다. 한 해 최고의 인기를 누린 ‘가수왕’이 부른 최고의 히트곡을 금지곡으로 지정하는 나라는 우주에서도 찾기 힘들 것이다.
송창식이나 정미조처럼 대중의 인기를 누린 사람들도 이랬으니 삐딱하게 보이는 가수들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정선, 한대수, 오세은, 양병집, 김의철 등 1974~75년에 음반을 발표하면서 데뷔한 싱어송라이터들이 줄줄이 금지곡을 지정당하고 이런저런 마음고생을 한 것은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이들 음반은 ‘금지곡 지정 이후 음반 전량 회수’라는 절차를 취하면서 일반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희귀음반이 되어 갔다.
지난 회에 보았듯, 1975년 가요계는 ‘금지곡의 행진’이었다. 물론 개별적으로 금지곡을 지정하는 일은 그 전부터 있었지만 1975년이 특별했다면 “모든 노래를 제작 당시의 상황이 아닌 현재의 눈으로” 전면적으로 ‘재심의’를 했다는 점이다. 1975년 6월 7일 문화공보부가 ‘공연물 및 가요 정화 대책‘을 발표하면서부터다. ‘대책’은 “1) 국가안전 수호와 공공질서 확립에 반하는 공연물 2) 국력배양과 건전한 국민경제발전을 해하는 공연물 3) 사회질서를 문란케 하는 공연물 4) 사회기강과 윤리를 해치는 퇴폐적인 공연물” 등 20개 항목에 해당하는 기준에 걸리면 어김없이 ‘정화’의 칼날을 뽑아든다는 것이었다.
이 ‘가요정화운동’을 기점으로 사전검열의 역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음반 마지막 트랙으로 ‘건전가요’를 뜬금없이(하지만 반드시!) 삽입하는 역사와 더불어 말이다. 1975년 5월 13일이 긴급조치의 집대성판인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된 시점이니 정치적 탄압과 문화적 억압은 손에 손 잡고 착착 진행된 셈이다.
결국 1975년 6월 이후 5차에 걸쳐 업데이트된 금지곡 리스트에는 1974~75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한 잔의 추억’(이장희), ‘미인’(신중현과 엽전들), ‘왜 불러’(송창식) 등이 골고루 포함됐다. 이 가운데 송창식을 제외한 신중현과 이장희의 이름은 1975년 12월 초 신문 지면을 큼지막하게 장식했다. 그것도 ‘연예면’이나 ‘문화면’이 아니라 ‘사회면’에.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