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음악·공연·전시

발빼는 가수에 보드카 먹여 녹음

등록 2005-12-14 23:01수정 2005-12-15 14:17

노승림의무대X파일 - 세계 최초 프로듀서 프레드 가이스버그
사진기가 발명되었을 때, 사진가가 가장 힘들어했던 것은 모델의 섭외였다고 한다.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미신 때문에 흔쾌하게 렌즈 앞에 나서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탓이다.

그런데 레코드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도 상황은 이와 유사했다. 지금은 보편적으로 인식되어 있는 레코드가 발명 초기에는 마술적인 기계로 인식되어 성악가들은 쉽사리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특히나 샬리아핀은 군중을 사로잡는 자신의 목소리에 마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고 있었고, 녹음을 하게 되면 그 힘을 기계에 빼앗긴다고 생각하며 한사코 거절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레코드 역사상 위대한 프로듀서를 언급할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프레드 가이스버그이다. 1894년 영국에 있던 베를리너의 그라모폰사(훗날의 HMV이자 미국 RCA의 모체, 그리고 현재의 EMI)에 들어간 그는 음반 역사상 최초의 프로듀서로 그 이름을 공고히 하고 있다. 이후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1700개가 넘는 음반을 기획, 제작했으며, 그가 남긴 녹음들은 가이스버그라는 이름과 더불어 모두 역사적인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녹음이 오늘날까지 명품으로 취급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한 가지는 ‘재능있는 성악가들을 알아보는 남다른 혜안’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그 혜안으로 알아본 재능있는 성악가’들을 어떤 방법을 써서든 녹음기 앞에 불러 세운 사명감과 고집이었다.

끝까지 녹음을 거부하던 샬리아핀은 가이스버그의 집념과 그가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권한 러시아산 보드카에 무너져 결국 스튜디오로 직접 걸어들어가 자신의 첫 음반을 남겼다(1901). 가이스버그는 두 번째 프로젝트로 이탈리아 밀라노 그랜드 호텔 306호에 묵고 있던 카루소를 찾아갔다. 아직 무명이었던 카루소는 생면불식의 음반사 직원의 간절한 요청에 호텔방에서 즉석해서 아리아를 열 곡을 불렀다.

가이스버그는 이를 간이로 녹음하여 세상에 내놓았으며, 1902년 발매된 이 음반은 카루소의 음성이 담긴 가장 오래된 레코드로 남게 되었다. 역사상 최후의 카스트라토로 기록되어 있는 알레산드로 모레스키(1902), 그리고 가이스버그의 깐깐하면서도 고집불통의 뮤즈였던 넬리 멜바(1904)가 그 뒤를 이었다. 특히 모레스키의 음반은 음반 역사상 최초의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가이스버그의 뛰어난 섭외능력은 당시 에디슨이 세운 포노그래프사와 시장을 다투던 그라모폰사에게 든든한 지원사격이 되어 주었다. 포노그래프사가 실린더 방식의 축음기를 고집했던 반면 그라모폰사는 원반형 디스크와 턴테이블을 최초로 도입했다. 당시만 해도 그라모폰사는 포노그래프사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포노래프사가 고집하고 있었던 실린더 방식의 축음기는 그라모폰사의 디스크 방식보다 음질이 훨씬 우수했고, 게다가 포노그래프사는 벌써 10년 전부터 시장을 선점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노그래프사는 훌륭한 하드웨어를 발명한 만큼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에디슨이 만든 그 훌륭한 축음기로 들을 수 있는 것은 기껏 무명가수의 노래나 코미디 대본을 녹음이 고작이었다. 사람들은 비싼 티켓을 내고 공연장에 들어가지 않으면 들을 수 없었던 굴지의 오페라 가수의 목소리가 녹음된 그라모폰사의 디스크를 앞다투어 사가기 시작했다. 1921년 레코드 산업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에디슨의 포노그래프사는 1929년 문을 닫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노승림/공연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팀장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