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무대X파일 - 비체 오페라 ‘카르멘’
영화 <파리넬리>라든가, 혹은 그와 비슷한 시대를 다룬 영화를 보면 극장의 분위기가 오늘날과 사뭇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찻잔을 달그락거리는 부인들, 서로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는 귀족들에게 무대 위의 공연은 단지 배경음악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19세기 말까지, 극장 분위기는 실제로 그러했다. 특히 오페라 극장은 사교의 장소로 명성이 높았다. 극장의 1층석이나 칸막이가 되어 있던 2층 특별석에서는 귀족 자녀들의 혼담이나 맞선이 이루어졌다. 사교를 위한 장소에 비극적인 드라마가 어울릴리는 만무했다. 당연히 밝고 명랑하며 도덕적인 내용의 가족 드라마가 관객들의 각광을 받았다. 중요한 문제를 논하기 위해 온 귀족들에게 적절한 분위기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만한 관객들에게 집중력을 요구한 최초의 작곡가는 바그너였다. 1876년 바그너는 자신의 음악극을 상연하기 위해 지은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서 처음으로 객석의 모든 조명을 끄고 모든 좌석을 무대와 마주하게 고정시켜 놓았으며 관객들끼리 속삭이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사실 이런 강제적인 조처가 없었다면 근친상간에 죽음이 난무하는 부담스런 줄거리에, 반나절을 꼬박 잡아먹는 상연시간, 그리고 결코 쉽지 않은 음악언어로 이루어진 바그너의 음악을 주목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동시대 작곡가였던 비제는 바그너보다 소심하고 유약한 예술가였다. 그런 그가 ‘바그너의 독재’가 행해지기 3년 전 파리에서 <카르멘> 초연을 시도한 것은 대단한 용기였다. 담배 공장에서 일하는 하층계급의 여성이 귀족 장교를 돌아가면서 유혹하다가 마침내 정부에게 칼에 찔려 살해당하는 이야기는 우아한 귀족들의 극장문화에 절대로 어울릴 수 없었다. 심지어 비제가 섭외를 시도한 극장은 오페라 코미크 극장으로, 명랑하고 밝은 프로그램으로 선보는 장소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공연을 제안받은 극장 감독은 일거에 거절했다.
“주인공이 애인에게 살해되는 그 이야기 말입니까? 도적, 집시, 담배 공장의 여공들이 나오는 그 소설로 만든 오페라 말이지요? 그걸 우리 극장에서 공연하라구요? 우리 극장은 가족 중심의 극장이에요. 매일 밤 특별석 5~6군데에서 맞선이 이루어지고 있단 말입니다. 관객들이 놀라서 도망가버릴 겁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비제의 장인이자 당대 유명한 작곡가였던 알레비부터 여러 예술계 저명인사들의 설득을 거쳐 결국 <카르멘>은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초연되는 그 순간까지도 갖가지 장애물을 넘어야 했다. 처음 타이틀 롤을 제안받았던 마리 로즈는 대본을 읽자마자 “너무 음란하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예술감독은 “우리 극장 무대에서 살인이 일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며 마지막까지 대본을 바꾸어주길 비제에게 요청했다. 소심하고 유약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진 비제가 이러한 난관을 일일이 겪어가며 <카르멘>의 초연을 강행했다는 점에 대해 당대 비평가들은 놀라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1875년 고생끝에 막이 오른 <카르멘>은 그러나 평단과 흥행 양쪽 모두에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격렬한 비난은 대부분 줄거리와 도덕적인 부분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평론가는 담배 공장 여공들의 합창에 대해 “지옥에서 쏟아져 나온 여자들이여!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며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오로지 조강지처 미카엘라 한 사람만 “이 터무니없이 퇴폐적인 지옥에서 유일하게 기품있고 공감을 받는 인물”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비제는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전해줄 이 유일무이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는 정확히 3개월 후에 인후염으로 세상을 떴다. 그의 나이 불과 36살이었다.
노승림 공연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팀장
노승림 공연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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