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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김광석, ‘서른 즈음’ 의 그를 되살린다

등록 2005-12-28 17:25수정 2005-12-29 15:25

김광석의 팬클럽 ‘둥근소리’는 1996년부터 2월마다 포크 노래 공연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에 열린 10회 공연에서 초대 손님으로 나온 그룹 ‘풍경’의 모습.
김광석의 팬클럽 ‘둥근소리’는 1996년부터 2월마다 포크 노래 공연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에 열린 10회 공연에서 초대 손님으로 나온 그룹 ‘풍경’의 모습.
노랫말이 내 얘기인듯…말 통하는 친구같아…

고 김광석의 노래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주된 주체는 그의 팬들이다. 1995년 6월1일 나우누리 통신에서 만들어진 둥근소리(oneum.net)는 김광석의 팬클럽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이다. 이승우(28) 소리지기는 “고등학생부터 40대 후반까지 회원은 4100여명이며 지금도 꾸준히 하루에 1~2명씩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1996년부터 2월마다 정기 공연을 벌이고 있다. 뜻 맞으면 갑자기라도 모여 그의 노래를 부르고 술잔을 기울인다.

고 김광석 팬클럽 ‘둥근소리’
세대 구분없이 회원 4100명
매해 2월이면 추모 공연

김광석의 노래는 곱씹을수록 다른 맛을 낸다고 한다. 깊은 감정 이입을 끌어내 나이와 처한 환경에 따라 느낌의 질감도 달라진다. 이 골수 팬들은 어떤 노래를 되새김질하고, 어떤 느낌을 추억하는지 세대별로 물어봤다.

정한나(23) 중학교 3학년 때 라디오에서 처음 들었어요. ‘사랑했지만’, ‘사랑이라는 이유로’였죠. ‘서른 즈음에’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에서도 전율을 느꼈어요. 하지만 아직 이 노래들에 완전히 공감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요즘엔 아껴두었다가 꺼내들어요. 까맣게 잊었던 추억을 우연히 만나는 느낌이 들거든요. 대학교 3학년인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게 돼요. 그래서인지 ‘나무’라는 노래가 와 닿아요. “누구에게 감사 받을 생각 없이 나는 나에게 황홀을 느낄 뿐이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펴려하오.”

이승우(28) 95년 11월 19살 때 광석이형 노래를 만났어요. 실연 당한 다음이었는데 ‘사랑했지만’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꾸밈없고 솔직한 느낌이었어요. 쉽게 사랑을 이야기하는 다른 노래들과는 달랐어요. 지금은 ‘서른 즈음에’를 들어요. 어른들이 단 맛보다 쌉쌀한 게 좋다는 건 그 나이가 안 되면 모른다고 하잖아요. 비슷한 거죠. 어느 순간 노랫말이 자연스럽게 제 이야기 같았어요. 서른 살은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시점인 것 같아요. 결혼도 직장도 고민하게 되고 많이 지치기도 하죠.

이진엽(35) 누구에게나 말이 통하는 친구가 있잖아요. 광석이형 노래는 저한테 그런 존재에요. 한번쯤 겪어봤을 아픔을 과장하지 않고 노래하잖아요. 10년 넘게 들어서 특히 뭐가 좋다 이런 거 없어요. 굳이 꼽으라면 ‘잊혀지는 것’,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요. 정신없이 살았던 지난 날을 많이 생각하게 되요. 이 노래를 들으면 ‘내가 한 때 정말 아프게 사랑한 적이 있구나’ 아련한 추억이 떠올라요. 원래 김창기가 노래한 ‘잊혀지는 것’을 들으면 내 기억에서 누군가 빠져나가고, 때로는 내 악의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광석이형은 이런 슬픔을 담담하게 토해내죠. 그래서 안 들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다시 듣게 되는 것 같아요.

20대 때는 광석이형 노래에서 희망을 많이 얻었어요. 경상남도 거제에서 26살에 서울로 왔는데 지치고 힘들 때 3집에 있는 ‘행복의 문’을 들었어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보람을 찾아야지’ 그랬죠.

정찬근(40) 광석이형이 떠났을 때 제가 30살이었어요. 밥 벌어 먹기 힘들어 미루다 공연을 못 본 게 그렇게 후회되더라고요. 그 뒤엔 안치환, 백창우 등의 콘서트는 빼놓지 않고 갔어요. 30대엔 정말 테이프가 늘어나도록 광석이형 노래를 들었어요. 제 이야기 같아서요. 지금은 그렇진 않아요. ‘그때 그랬지’ 그런 생각이 드는 ‘서른 즈음에’나 따뜻한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정도만 찾아 듣죠. 요즘엔 광석이형 노래 자체보다는 둥근 소리 회원들과 기타 치며 노래 불렀던 추억이 더 살갑게 느껴져요.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둥근소리 제공


솔로 데뷔뒤 모던포크 계승 절정기때 요절 슬픔 더해

김광석의 음악 여정

1970년대에는 많은 ‘통기타 가수’들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그럴싸한 노랫말로 귀를 가렵게 하는 ‘팝 같은 가요’를 부를 뿐이었다. 시대를 아우르는 노래를 했던 이들 가운데 음악예술가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한대수, 김민기, 조동진, 정태춘 정도였다. 이 ‘모던포크’의 전통은 80년대엔 그룹 ‘따로 또 같이’로, 90년대에 고 김광석으로 이어졌다.

김광석은 음악활동 초기부터 뛰어난 음악인이거나 모던포크를 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1984년 김민기의 <개똥이> 음반에 참여했다. 이 때 만난 몇몇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참여해 공식 데뷔했다. 1988년 ‘동물원’ 1집에 실린 ‘거리에서’와 ‘동물원’ 2집에 실린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를 불러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동물원’은 김창기와 유준열의 노래로 빛을 발하는 밴드였고, 여기서 김광석은 노래 잘하는 가수였을 뿐이다. 그리고 솔로 데뷔 뒤 발표한 ‘너에게’가 담긴 1집(1989)이나, ‘사랑했지만’이 담긴 2집(1991)은 그리 평가할만한 음반은 아니었다.

변화의 시작점은 ‘나의 노래’라는 자기 고백이 담긴 3집(1992)부터였다. 정태춘·박은옥만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던 모던포크의 의미를 부활시킨 <다시 부르기 1>(1993)을 발표하고 나서 그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 스스로 “제 자리를 찾은 느낌인 만족스런 앨범”이라고 말했을 만큼 훌륭한 음반인 4집(1994)은 전체적으로 그 동안의 발라드 계열에서 포크 계열로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음반의 색깔은 이전과 달리 무거워 대중적인 인기는 크게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나이에 맞는 삶의 무게를 가진, 그리고 진지하게 삶을 바라보는” 노래들을 부르는 데 성공했다. 이 음반에는 진정한 싱어송라이터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어나’ 이외에도 ‘바람이 불어오는 곳’,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서른 즈음에’, ‘자유롭게’라는 명곡이 실렸다. 한영애, 장필순과 같이 예술적인 자의식과 노력으로 데뷔한 지 한참 뒤에야 훌륭한 싱어송라이터로 거듭 나는 흔치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박준흠 대중음악평론가·광명음악밸리축제 예술감독
박준흠 대중음악평론가·광명음악밸리축제 예술감독
유작인 <다시 부르기 2>(1995)는 한대수 이래 탄생한 모던포크의 계승자로서, 자신의 곡을 포함한 한국 모던포크의 명곡들을 추려서 다시 녹음한 것이다. 조동익밴드의 멋진 세션으로 리메이크곡들이 원곡들을 거의 전부 능가하는 흔치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대수의 ‘바람과 나’, 양병집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원곡은 밥 딜런의 ‘돈 싱크 투와이스, 이츠 올라잇’), 김의철의 ‘불행아’, 자신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등이 담긴 이 음반은 뛰어난 노랫말과 담백한 연주로 언제 들어도 실증나지 않는 한국 포크록의 명반이 됐다. 그가 숨진 뒤 헌정앨범 형식으로 <가객-김광석이 남기고 간 노래>(1996)가 발표됐다. 여기에는 미발표 곡인 ‘부치지 않은 편지 #1, 2’가 그의 절절한 목소리로 실려 있다. 당시 김광석은 작곡가 백창우와 함께 시를 대중가요로 만드는 <노래로 만나는 시>라는 앨범을 기획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첫 번째로 정호승 시에 백창우가 곡을 붙인 ‘부치지 않은 편지’를 녹음한 것이다.

그는 서른 셋에 이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음악적인 절정기를 맞고 있을 때 떠난 것이라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분명히 4집은 자신이 생각하는 새로운 음악의 시발점이었다. 그런데 이 시발점이 영원히 끝이 맺어지지 않을 종점이 되어버렸다는 것은 한국 포크록계의 커다란 손실이기도 하다.

박준흠/대중음악평론가·광명음악밸리축제 예술감독

“자살 아닐것” 의혹 끊이지 않아…‘저작인접권’ 놓고 유족간 얼굴 붉히기도

1996년 1월6일 김광석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서른 즈음에’, ‘일어나’ 등으로 인기를 끌며 한창 활발하게 활동하던 가수가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가 자살하지 않았을 거라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경찰은 타살 흔적이 없고 목을 맨 흔적이 뚜렷해 자살로 결론지었다. 긴급수사반을 편성하고 부검도 했지만 의심할 만한 단서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 김수영과 팬클럽 둥근소리 회원들은 2003년 1월 5일 문화방송 <시사매거진 2580>에서 김광석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전설적인 록밴드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1994년 권총자살한 뒤 지금까지도 그 죽음의 진실을 캐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김광석의 자살도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저작인접권을 둘러싼 유족 사이 분쟁은 안타까움을 부추겼다. 1996년 김광석의 부모와 부인 서해순은 아버지가 3·4집과 <다시 부르기 1·2>에 대한 저작인접권을, 부인은 이후 라이브 음반에 대한 권리를 나눠 갖기로 합의하면서 갈등은 누그러진 듯했다. 하지만 김광석의 여러 앨범에서 곡들을 따온 추모앨범이 나올 때마다 논란은 다시 불붙었다. 2001~2002년엔 <김광석 앤솔로지 1> <5TH 클래식> <컬렉션-마이 웨이>가 문제가 됐다. 서씨는 저작인접권 침해로 벌금 300만원을 선고 받았지만 항소한 상태다.

김광석의 아버지가 숨진 뒤엔 그 권리를 애초 합의대로 김광석의 딸에게 줄 건지, 아버지의 유서에 따라 형과 어머니에게 줄 건지를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졌다. 지난 7일 서울중앙지법은 딸의 권리를 주장하는 서해순의 손을 들어줬다.

김소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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