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무대 엑스파일 - 피아니스트 어빈 니레지하치
리스트를 좋아하는 클래식 애호가라면 기억해야 할 이름이 다름아닌 어빈 니레지하치이다. 190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이 피아니스트는 어린 시절에는 신동으로서, 세상을 뜰 무렵에는 그 드라마틱한 삶으로 세상을 감동시켰다.
네 살 때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여섯 살에 이미 대부분의 마스터피스를 섭렵하여 주변을 놀라게 했다. 암스테르담 심리연구소장이었던 레베즈 박사는 니레지하치를 연구대상으로 삼아 <음악신동의 심리학>이란 저서를 집필했는데, 그가 가진 모든 음악적 능력, 즉 초견능력, 기억력, 즉흥연주, 조바꿈, 작곡능력 등이 학습에 의해 점진적으로 발전했다기보다 선천적으로 타고났다고 적고 있다.
“헝가리 사람이라면 당연히 리스트를 연주해야 한다”는, 1914년에 만난 바이올리니스트 페렌츠 베체이의 충고는 그를 앞뒤 안 돌아보고 오로지 리스트만을 연주하는 광적인 스페셜리스트로 만들었다. 이것은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는 대목인데, 초창기 니레지하치가 연주한 쇼팽과 라흐마니노프, 그리고 스크랴빈이 리스트와는 또다른 감동을 자아냈다는 소문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니레지하치의 환경은 음악성에 부응하지 못했다. 주변인들은 천재의 재능을 키워주기보다는 이용하기 급급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명성을 돈벌이로 악용하려 들었고, 매니저는 어머니보다 더한 악덕 흥행사로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무대도 가리지 않고 섭외했다. 심지어 그 가운데에는 서커스 장에서의 초견연주 묘기까지 있었다. 안정을 찾고자 11살 연상의 여성과 결혼하였지만 그녀 또한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돈밖에 몰랐다. 이런 인물들 사이에서 부대끼던 그는 20대 이전에 벌써 명성을 날리고 있었음에도 지하철역에서 노숙을 하며 연주여행을 다녀야할 만큼 가난에 시달렸다. 간혹 공정한 흥행사를 만나기도 했지만, 다른 레퍼토리는 전혀 연주하지 않고 리스트만 고집하는 니레지하치에게 혀를 내두르며 떠나갔다. 음악인생에 회의를 느낀 니레지하치는 겨우 20대의 나이에 은퇴를 결심하고 잠적했다.
그가 음악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약 40년 뒤인 1973년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콘서트홀이었다. 음악계를 떠난 뒤 뉴욕의 부랑자로 전락한 니레지하치는 젊은 시절 엘시 스완이라는 여성으로부터 작은 도움을 받은 바 있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우연히 재회한 그녀는 이미 일흔아홉 살의 노파가 되어 있었으며 또한 병중이었다. 일흔살이었던 니레지하치는 그녀에게 청혼을 하였고 이 리사이틀은 바로 아내의 치료비를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일흔살의 노인이었지만 니레지하치의 연주력은 여전했다. 우연히 이 콘서트를 지켜보던 당시 씨비에스(CBS) 레코드사의 테리 맥네일은 그 신들린 연주에 넋을 잃고 말았다. 마지막 프로그램이 시작될 즈음 이 프로듀서는 정신을 차리고 가지고 있던 녹음기 버튼을 눌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유일무이하게 남아 있는 니레지하치의 실황레코딩인 리스트의 <두 개의 전설>이다. 이 녹음은 발매되자마자 말 그래도 ‘전설’이 되어 음악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가져왔다. 당대 음악 평론가 헤롤드 숀버그는 “19세기 연주 스타일을 고스란히 간직한 기적적인 연주”라고 평했다.
니레지하치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엘시 스완은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났다. 니레지하치는 또다시 자취를 감추었고, 1987년 그대로 잠적한 가운데 사망했다. 니레지하치의 <두 개의 전설>은 이후 절판되었다가 1990년 중반 마스터테이프를 확보한 텔덱 레이블을 통해 세상에 다시 한번 소개되었다.
노승림 공연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팀장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