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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무대에서 더 오래 춤추고 싶어 미련없이 학업 중단했죠”

등록 2020-03-19 18:27수정 2020-03-20 02:04

[짬] 핀란드 국립발레단 유스컴퍼니 강혜지 발레리나

강혜지양이 지난달 27일 헬싱키 핀란드 국립발레단 스튜디오에서 연습하고 있다. 신소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객원연구원
강혜지양이 지난달 27일 헬싱키 핀란드 국립발레단 스튜디오에서 연습하고 있다. 신소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객원연구원

발레 <라 바야데르>의 3막. 인도의 전사 솔로르는 연인 니키아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슬픔에 잠겨 있다. 환각 속에서라도 니키아를 만나기 위해 그는 아편의 힘을 빌려 꿈속으로 빠져든다. 꿈속에서 망령들의 왕국에 다다른 솔로르.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튀튀를 입은 아름다운 무용수들이 사후세계의 정령들처럼 절제된 동작으로 차례차례 등장한다.

서른 명이 넘는 무용수들이 펼치는 군무는 라 바야데르의 백미로 꼽힌다. 그때 무용수들을 제치고 사뿐히 점프하며 솔로 연기를 펼치는 앳된 소녀. 유럽인이 다수인 핀란드 국립발레단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검은 머리의 발레리나 강혜지(18)양이다. 그를 지난달 27일 헬싱키의 핀란드 국립발레단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싱그러운 미소를 띠고 동료들과 재잘거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여고생이다. 하지만 연습이 시작되자 진지한 모습으로 손가락 마디 끝까지 감정을 실어 보내고 시선을 처리하는 그는 벌써 핀란드 국립발레단 유스컴퍼니 소속 3년 차 프로 발레리나다. 그는 국립발레단 무용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무대에 오르고 있다. 현재 유럽에서 데뷔해 프로로 활동하고 있는 10대 한국인은 그가 유일하다.

그는 고1 때 한국에서의 학업을 중단하고 핀란드로 갔다. 프로 발레리나로서 커리어를 일찍부터 쌓고 싶어서다. 세계 여러 발레단에서 유스컴퍼니를 운영하며 어린 유망주들을 키우고 있지만 그처럼 만 16살 나이에 커리어를 시작하기는 흔치 않다. “만약 제가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면 학교에 다니는 게 좋았겠지만 저는 무용수가 꿈이었어요. 그 꿈이 이미 제게 다가왔기에 학교를 그만두는 데 큰 미련이 없었어요.”

그는 중학교 1학년이 돼서야 본격적으로 발레에 전념했다. 일반 중·고교에 다니며 발레를 배우느라 학원에서 자정을 넘기며 연습하기 일쑤였다. 시작은 늦었지만 발전 속도는 어마어마했다. 2017년 한국 청소년 발레 그랑프리를 차지한 뒤 같은 해 홍콩에서 열린 아시안 그랑프리에서 유스 그랑프리, 이듬해는 월드 발레 그랑프리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국제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세계 유수의 발레 학교로부터 입학 제안을 받았다.

다소 늦은 중1에 발레 본격 시작
얼마 안 가 국제대회 잇단 두각
고1 때 ‘러브 콜’ 핀란드 무대로

지난해 발레단 솔리스트 대역도
“학교 다녔다면 경험 못 했을 일
춤으로 나 표현할 때 가장 즐거워”

늦게 시작한 만큼 부상도 잦았고 괴로움도 뒤따랐다. 아시안 그랑프리에 나갈 때는 연습 중 점프 후 착지 과정에서 발을 잘못 디뎌 발목 인대가 파열됐다. 그렇지만 대회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넋 놓고 회복만 기다릴 수는 없었다. 발목에 테이핑하고 연습했고 무통 주사를 맞고 대회에 나갔다. 당시 그의 모습을 눈여겨본 핀란드 국립발레단 단장이 그를 오디션도 없이 유스컴퍼니로 스카우트했다. 이를 악물고 버틴 결과였다. “다른 나라 발레 학교로 가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핀란드에 가서도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죠. 하루라도 빨리 프로 무대에 서고 싶었어요. 발레 무용수들은 40대에 은퇴해 저는 조금이라도 오래 무대에 있고 싶어 핀란드 무대를 선택했죠.”

강혜지 발레리나. 신소영 객원연구원
강혜지 발레리나. 신소영 객원연구원

그는 아직은 주로 군무를 추는 코르드 역할이지만 점점 솔리스트로서의 기회가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라 바야데르 공연에서는 솔리스트를 맡은 무용수가 갑작스레 부상을 당하며 공백이 생기자 그가 바로 대역을 맡았다. 이 역할을 하는 무용수 부상을 대비해 대역들이 정해져 있었지만 배역은 그에게 돌아갔다. “저보다 경험이 많고 경력도 오래된 발레리나들이 많아 제게 기회가 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아 정말 놀랐어요. 게다가 이전에 해본 적이 없는 역할인 데다가 단 하루 만에 리허설을 마치고 바로 무대 위로 올라야 했어요. 아마 발레 스쿨을 다니거나 한국에서 계속 공부했다면 제 나이에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일이었을 거예요.”

발레를 하기 전 한국무용과 현대 무용을 배웠다는 그는 자신만의 강점으로 클래식 발레에서 볼 수 없는 표현의 자유로움과 독특함을 꼽았다. 발레는 형식미도 중요하지만 무용수 개인의 표현 방법과 독창성도 중요하게 여긴다. 특히 유럽 발레단에서 눈여겨보는 그의 재능이다.

“진정한 예술가가 되고 싶어요. 저는 발레를 하며 저 자신을 표현할 때 정말 즐거워요. 관객들이 제 춤의 기교적인 완성도를 보는 걸 넘어서 제가 느끼는 그 감정을 그대로 느끼게 하는 그런 발레리나가 되고 싶어요.”

헬싱키/신소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객원연구원 soyoung.f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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