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투원(P21) 갤러리 첫번째 방에 걸린 백현진의 신작 <밤이 새도록>(아래)과 위에 걸린 동그란 소품 <지평선>.
‘나에게 오라/
농담과 통곡들/ 핑크빛 광선을 뚫고/ …침묵과 반성들…섬광과 혼란들/ 저 핑크빛 광선을 뚫고/
나에게 오라’
지난달 21일 오후 해 저물녘이었다. 인적 뜸해진 서울 남산 해방촌 근처 회나무길(일명 경리단길)에 백현진 작가의 괴성 섞인 노래가 울려 퍼졌다. 무대는 그가 이틀 전(3월19일) 개인전 ‘핑크빛 광선’을 시작한 길가 갤러리 피투원(P21) 들머리. 지인의 색소폰 반주를 배경으로 퍼포먼스를 벌이는 참이었다.
가슴속 심연에서 터뜨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한동안 남산 기슭 회나무로 주변의 골목길과 주택가, 상점가로 스며들었다. 현대풍 민화가 비치는 작업실과 마네킹이 늘어진 옷가게, 목욕탕 로고를 단 이색 식당들이 낡은 연립주택, 달동네 꼬막집, 가지 산발한 고목들과 어울린 이 동네에 백현진의 퍼포먼스는 미묘한 활기를 불어넣었다.
전시장 첫번째 방 측면에 붙은 <말할 수 없는> 연작의 세부. 그의 감정과 정서를 섬세하게 드러내는 붓질의 미묘한 흔적이 보인다.
관객들은 투명한 유리 출입문으로 비치는 전시장의 백현진 신작들이 온통 검은빛으로 덮였거나 맨살 화폭에 아련한 푸른빛이 스며들고, 유령처럼 허연 막을 빛내는 것을 봤다. 코로나19 사태로 전시장 가기도 쭈뼛거려지는 상황에서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미술인들 사이에선 “묘한 위로감을 얻었다”는 반응이 나왔다.
백씨는 한국 인디밴드 1세대 ‘어어부 프로젝트’의 보컬 멤버이자 솔로 가수다. 영화와 티브이 드라마 배우, 행위예술가, 감독과 디자이너 등 전방위 예술가로 활약해왔다. 미술판에서 찰나의 감정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감각주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한 그림을 놓고 지루하게 덧칠하면서 미완의 그림을 되풀이하는 작법, 감정이 깃든 추상적 색면과 선율 같은 필선에 얼굴이나 욕설 문구, 사물 형상 등을 섞어 표현하는 백현진표 회화는 이번 신작전에서 또 다른 변모와 모색을 보여준다.
전시장 두번째 방 안쪽에 걸린 그의 신작 <퍼런 이빨> 연작의 세부. 온통 푸른빛으로 채운 화면에 희고 노란 색선 두가닥이 수직으로 뻗어 올라가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지난해 2~3월 열린 개인전 ‘노동요: 흙과 매트리스와 물결’전이 다분히 시장 스타일에 맞춤한 특정 문양과 정제된 색면을 부각했다면, 신작들은 고립되고 고독해진 자기 내면을 어느 때보다도 가감 없이 노출한 느낌을 준다. 원래는 밝은 초록색 면이었다가 대부분 검게 덮어버린 첫번째 방의 검은 대작 두 점이 먼저 시선을 앗아간다. 한참 보다가 그 위 천장 가까운 쪽에 예민한 파장의 선들로 채워진 동그란 화판 소품이, 그리고 그 옆 공간에 못 하나 뎅겅 박아놓고 아무것도 걸지 않은 설치작품을 만나게 된다. 두번째 방에서도 이미지와 색면 일부만 걸쳐놓은 큰 작품 옆에 푸른빛 색면추상 그림 하나를 팽개쳐놓은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안쪽 방에서는 마치 영혼이 주행하듯 두 줄의 밝은 선이 푸른빛 화면을 지나가는 작품이 내걸렸다. 작가는 지난해 갤러리 쪽에 신작전의 전시 제목 ‘핑크빛 광선(P-ray)’을 제안하면서 “새 관계에 대한 막연한 욕망에서 ‘핑크빛’을 떠올렸고, ‘핑크빛 광선’이 그려지는 동시에, 이내 명멸하는 신기루 같은 것이라 느꼈다”는 감회를 털어놓았다. 이달 26일까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