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무대X파일 - 비오티와 스트라디 (1)
18세기를 풍미한 이탈리아 출신의 지오바니 바티스타 비오티의 이력은 다채롭고 또 특이하다. 무려 스물 아홉곡이나 되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남긴 원기왕성한 작곡가였으며 프랑스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를 포함한 유럽 전역의 관객들을 사로잡은 최고의 연주가이기도 했다.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다음에는 파리 오페라극장을 소유하려고 시도할 만큼 흥행주 및 경영인으로서의 재능을 살짝 드러냈지만 프랑스 혁명으로 인하여 불발에 그쳤다. 정치적인 이유로 런던으로 피신해서는 잠시 와인장사를 하다가 다시 파리로 복귀하여 결국에는 최고의 지휘자이자 음악 교육자로서 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가 남긴 업적은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악기의 명성을 세상에 널리 퍼뜨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음악의 중심지로서 오스트리아 빈과 각축전을 벌이고 있던 프랑스 파리는 적어도 공연산업에 있어서는 빈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런 파리는 이탈리아 연주가와 기교 위주의 음악스타일을 경시했으며, 특히나 바이올린을 독주 악기로 인정하지 않았다. 음량이 빈약한 이 악기는 그저 오케스트라 합주용으로 족하다는 것이 우렁찬 당대 궁정악단의 연주에 익숙한 파리 시민들의 일반적인 편견이었다.
1782년 3월 28일 파리 콩세르 스피리튀엘에서 열린 비오티의 리사이틀은 이러한 편견과 파리인들의 취향을 180도 뒤집어 놓았다. 비오티의 기교는 분명 대단한 것이었지만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은 기름지고 화려한 사운드를 가진 그의 바이올린이었다. 평소 이 공연장에서 연주되던 바이올린에 비해 두 배가 넘는 음량을 가진 이 악기의 풍부한 표현력과 마치 사람의 노랫소리와 같은 선율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한 평론가는 “관객은 물론 연주가 자신마저 악기의 비범한 소리에 압도당했다”는 평을 남겨놓았다.
이 악기는 비오티 공연 이후 최고의 화두로 대두되었으며 파리 시민들은 그제서야 장인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선망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비오티처럼 연주하고 싶다”는 말은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연주하고 싶다는 의미가 되었다.
비오티가 이 악기를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전해진다. 그 가운데에는 30살 연상의 연인이었던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사랑의 징표로 선물했다는 낭만적인 전설도 포함되어 있다. 꼭 스트라디가 아니더라도 비오티는 명기에 대한 욕심이 남달랐다. 그의 귀는 명인의 작품에서부터 거리의 무명의 악사에 이르기까지 차별이 없었다.
한 번은 친구와 함께 샹젤리제를 걷다가 거리에서 맹인 악사가 양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바이올린보다 오히려 시끄러운 클라리넷 소리에 더 가까운 이 악기에 호기심이 생긴 비오티는 20프랑을 주고 그 악기를 사기로 했다. 한데 비오티가 바이올린을 받아들고 연주하자 맹인이 연주할 때와는 달리 지극히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왔다. 동행했던 친구는 즉흥적으로 모자를 돌려 거리에 몰려든 청중들로부터 재빨리 돈을 긁어모았고 이 돈을 악기 값으로 악사에게 주었다.
그러나 악사는 그새 태도를 바꾸었다. “이 바이올린이 그렇게 좋은 건 줄 몰랐소. 그 돈의 두 배는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이 말을 칭찬으로 들은 비오티는 흔쾌히 원하는 만큼의 금액을 지불했다. 악사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 그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그 맹인 악사의 조카였다. “내가 그 바이올린을 만들었어요. 1대당 6프랑씩 준다면 20대는 더 만들어 줄 수 있는데….”
노승림/공연칼럼니스트, 대원문화재단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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