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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작가의 눈길, 100년 시공간을 훑다

등록 2020-06-16 18:15수정 2020-06-17 02:37

[전소정 개인전 ‘새로운 상점’]
지난해 에르메스 수상작가
이상 연작시에서 영감
전근대·근대·현대 뒤섞어
“지금은 과거의 연속성
전 사실 현재에 관심”
지난 9일 전시장에서 만난 전소정 작가. 조형물 <오르간> 앞에서 전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오르간>은 페트병, 빨대, 일회용 컵 등 버려진 플라스틱 제품에 열을 가해 만든 기묘한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전근대와 근대가 뒤섞인 서울의 현재 풍경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작가는 이상이 소설 <날개>에서 정오의 사이렌이 울릴 때 모든 것이 끓어 녹아내리는 도시를 상상했던 대목을 참조해 만들었다면서 ‘현재를 각성하는 순간’을 제안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9일 전시장에서 만난 전소정 작가. 조형물 <오르간> 앞에서 전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오르간>은 페트병, 빨대, 일회용 컵 등 버려진 플라스틱 제품에 열을 가해 만든 기묘한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전근대와 근대가 뒤섞인 서울의 현재 풍경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작가는 이상이 소설 <날개>에서 정오의 사이렌이 울릴 때 모든 것이 끓어 녹아내리는 도시를 상상했던 대목을 참조해 만들었다면서 ‘현재를 각성하는 순간’을 제안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작가의 눈길은 100년에 걸친 시공간을 훑는다. 서울과 일본 도쿄, 프랑스 파리의 골목과 건물 사이를 여기저기 타넘는다. 세 도시의 지금 공간뿐 아니라 100년 전, 90년 전 공간에서도 과거의 이미지와 소리를 가져와 현재에 맞붙여놓았다.

코로나19 사태로 나라 밖으로 가는 문이 가로막힌 요즘, 전소정(38) 작가의 전시는 독특한 해방감을 안겨준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에르메스 코리아 매장 지하에 있는 아틀리에 에르메스에 ‘새로운 상점’이란 제목으로 차린 신작전은 지난해 서울, 도쿄, 파리 세 도시의 공간과 역사를 누비며 만든 작업의 기억을 짜 넣은 결실이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시인 이상(1910~1937)이 1932년 <건축무한육면각체>란 제목으로 발표한 연작시의 첫번째 작품 ‘새로운 상점’(AU MAGASIN DE NOUVEAUTES)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상은 1930년 개장한 경성 미쓰코시백화점을 돌아본 뒤 거대한 근대 자본주의 상업공간에서 느낀 경이와 공포에 몸을 떨었고, 그 감상을 일본어와 프랑스어가 뒤섞인 난해한 시로 풀어냈다.

‘새로운 상점’의 전시장 모습. 공사장의 허술한 비계처럼 보이는 아치형, 격자형의 철제 구조물들이 영상과 폐플라스틱 조형물 &lt;오르간&gt;을 둘러싸고 있다. 작가는 이 철제 구조물을 근대의 아케이드 상점가를 표상해 만들었다고 말했다.
‘새로운 상점’의 전시장 모습. 공사장의 허술한 비계처럼 보이는 아치형, 격자형의 철제 구조물들이 영상과 폐플라스틱 조형물 <오르간>을 둘러싸고 있다. 작가는 이 철제 구조물을 근대의 아케이드 상점가를 표상해 만들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이 시에서 단서를 찾았다고 밝혔지만, 시 내용은 부각하지 않는다. 100년 전 이 땅과 일본, 프랑스 근대도시의 옛 이미지와 텍스트를 끄집어내어 21세기의 이미지와 맞붙이면서 팬데믹이 밀어닥친 우리 앞의 현실과 미래를 통찰해보려는 게 전시의 얼개다. 지난해 국내 최고의 권위를 지닌 에르메스코리아 미술상을 받은 뒤 특전으로 받은 4개월간의 프랑스 파리 레지던시 작업 경험을 바탕으로 전시의 틀을 만들었다. “근대가 지금 한국과 서울의 우리에게, 아방가르드 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계속 관심이 있었어요. 2018년 아르코미술관이 서울의 건축물을 매개로 서울의 근대성을 살펴보는 주제전을 연 적이 있는데, 이상의 초기 작품에 담긴 서울의 근대성을 주목하게 됐습니다. 사실 지금 고민하는 환경오염의 문제, 개발이나 과학기술 발달 이면의 고민을 거의 100년에 가까운 시차 안에서 고민해볼 여지가 있어요. 지금이 과거와의 연속성 없이 생겨난 게 아니니까요.”

전시의 핵심 출품작인 25분짜리 영상물 &lt;절망하고 탄생하라&gt; 후반부의 ‘파쿠르’(자유이동 기술)를 시작하는 장면. 서울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창신동 고지대 달동네의 옥상과 골목길 사이를 장애물을 활용해 자유롭게 이동하는 탈주의 몸짓을 보여준다.
전시의 핵심 출품작인 25분짜리 영상물 <절망하고 탄생하라> 후반부의 ‘파쿠르’(자유이동 기술)를 시작하는 장면. 서울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창신동 고지대 달동네의 옥상과 골목길 사이를 장애물을 활용해 자유롭게 이동하는 탈주의 몸짓을 보여준다.

근대 역사 속에서 서구와 동양 도시 사이의 공간을 누비며 의미를 직조하는 전시는 티브이 다큐나 영화에서 끌어온 여러 장면을 오버랩한 영상과, 폐플라스틱으로 만든 조각과 출판물의 설치로 구성된다. 핵심인 영상물 <절망하고 탄생하라>는 30년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서울·도쿄·파리 거리와 건물의 이미지가 뒤얽혀 있다. 30년대 미쓰코시백화점에서 옷을 흥정하는 영화 필름 속 풍경이 현재 서울 백화점의 수영복 마네킹 영상과 얽히고, 일본 미쓰코시백화점 매장의 풍경 영상이 지금 인왕산 굿판 소리가 들리는 신세계백화점 풍경과 얽힌다. 20년대 체펠린 비행선의 비행을 소개하는 뉴스 멘트와 인왕산 기슭에서 본 서촌의 풍경, 파리의 주택가와 서울 종로구 창신동 달동네에서 건물 지붕과 담을 뛰어넘는 파쿠르(자유이동 기술) 장면을 통해 도시 내부를 몸으로 체험하는 영상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조형물 <오르간>이다. 페트병, 빨대, 일회용 컵 등 버려진 플라스틱 제품에 열을 가해 만든 기묘한 덩어리인데, 전근대와 근대가 뒤섞인 서울의 현재 풍경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영상물 &lt;절망하고 탄생하라&gt;에 등장하는 1930년대 영화 &lt;미몽&gt;의 경성 도심 차량 주행 장면. 이 땅의 근대를 표상하는 장면으로 삽입됐다.
영상물 <절망하고 탄생하라>에 등장하는 1930년대 영화 <미몽>의 경성 도심 차량 주행 장면. 이 땅의 근대를 표상하는 장면으로 삽입됐다.

전소정 작가는 2000년대 이래 몸짓과 텍스트 등 비미술적 흐름으로 작업하는 여성 작가 그룹의 주역으로 꼽혀왔다.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2007년 데뷔 전시를 했던 작가는 애초 일상에서 잘 보이지 않는 부분, 보지 않는 부분에 주목하는 주관적 사진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2010년대 이후 관심이 미디어아트 영상으로 확대되면서 미싱사, 줄타기 장인, 해녀 등 장인이나 특정 분야 전문가의 삶과 작업에 예술가의 성찰과 태도, 문제의식을 투영한 작업을 선보여왔다.

“제가 다뤄온 사회 속 장인이나 지금 우리가 사는 시간대, 일상이라는 게 사실 조금만 시간 축을 이동해보면 어떤 연속성 안에서 이해할 수 있어요. 전 사실 근대를 통과한 현재에 관심 있어요.”

영상물 &lt;절망하고 탄생하라&gt;에 등장하는 1930년대 영화 &lt;미몽&gt;의 경성 도심 차량 주행 장면. 이 땅의 근대를 표상하는 장면으로 삽입됐다.
영상물 <절망하고 탄생하라>에 등장하는 1930년대 영화 <미몽>의 경성 도심 차량 주행 장면. 이 땅의 근대를 표상하는 장면으로 삽입됐다.

철골로 이어붙인 전시장 골조는 썰렁하다. 영상의 내용은 난해하고 불친절하며 암호 찾기와도 같다.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매혹되는 것은 코로나19로 막힌 일상에서 신선하게 다가오는 자유의 감성 때문일 것이다. 1930년대와 21세기의 한국·일본·프랑스의 도시 공간을 자유롭게 오가고, 파쿠르로 건물 사이를 뛰어넘는 공간적 유영을 감행하는 시각적 역동성, 다른 작가의 다큐 사진이나 영상에서 볼 수 없는 구성과 형식의 새로움과 독창성이 시선을 끈다. 7월5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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