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희 작가의 2019년 작 <중문거리(Jungmoon Street) 201908>의 일부. 자연 세계를 넘어 인간의 일상적 풍경이 편안한 필치로 등장하면서 화풍의 변모를 일러준다.
알싸한 공기의 감촉이 먼저 와닿는다. 그의 화폭에서 받은 느낌은 무엇보다 촉각적이었다.
2017년 미대 교수직을 내려놓고 제주에서 작업에 전념해온 한국화가 김보희(68)씨의 근작이 내뿜는 감각은 특출하다. 지난달부터 서울 종로구 사간동 금호미술관에 차려진 23번째 개인전 ‘투워즈’(Towards)에 작가는 대기감이 짙게 감도는 섬 풍경을 옮겨낸 근작 30여점을 내걸었다.
지난해 중문단지 근처의 도로와 자연, 바다를 소재로 그린 2층의 <중문거리>(Jungmoon Street) 연작 2점은 최근의 작업적 흐름을 드러낸 수작이다. 지난해 5월 그린 푸른빛 톤의 <중문거리 201905>는 푸른빛 여명이 멀리 수평선 위에서 밝아오는 새벽녘 시간대를 배경으로, 중문단지 근처 도로에서 불빛을 켜고 달려오는 자동차의 정면을 보여준다. 시커먼 소철목 실루엣 사이로 촉촉한 아침 공기를 밀어내듯이 질주해오는 차의 아롱지는 불빛이 대기의 감각을 일깨운다.
김보희 작가의 2019년 작 <중문거리(Jungmoon Street) 201905>의 일부. 새벽녘 중문단지 근처 도로의 대기감 넘치는 풍경을 담고 있다.
지난해 8월 그린 진홍빛 톤의 <중문거리 201908>은 해가 지고 누렇게 빛나는 단지의 저녁 하늘 아래 후면등을 밝히고 달리는 승용차의 뒷모습을 연출한다. 자동차와 하늘, 안쪽의 단지 건물 사이에 후끈한 여름 공기가 내려앉아 있다. 명쾌한 선으로 풍경의 경물을 구획하지 않고 색조의 미묘한 변화를 통해 화면의 대기감을 빚어낸 내공이 느껴진다. 지난 40여년간 자연 풍경을 화폭에 섭렵해온 작가는 ‘묘사란 작가와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공기를 시선이 통과하면서 이뤄지는 행위’임을 일러준다.
세부는 세부대로 원경은 원경대로 구체성을 담아내는 묘사의 힘도 넘친다. 김보희 작가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2019년 작 <테라스>에서 새삼 실감할 수 있다. 자신의 작업실 테라스를 8개의 조각 캔버스를 모아 표현한 이 작품은 다양한 시점의 화면을 조각조각 이어붙인다. 철제 의자와 목제 선반, 자신의 화집이 놓여 있는 탁자, 반려견 등은 가까운 근경에 놓고, 다양한 풀꽃과 소철나무를 중경에, 바다와 숲을 원경에 배치한 구도다. 각각 다른 장소에서 내려다보거나 멀리 바라보는 시점을 섞어 풍경의 전체적인 윤곽을 유지할 수 있는 화면을 만들어냈다.
김보희 작가의 2019년 작 <중문의 푸른 밤>(일부분).
작가는 집요하게 자연과 풍경에 대한 묘사를 실험해왔다. 첫 개인전을 한 1980년 이래 여인과 동물, 바다와 강변에 대한 채색화부터 시작해 양수리 한강의 수면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거나 점묘적 터치의 수묵화로 담아내는 1980~90년대의 시도를 거쳤다. 2000년대 초반 이래 제주로 시선이 옮겨간 뒤에도 계절을 달리해 펼쳐지는 섬의 자연 풍경을 시간성이 함축된 풍경 정물 그림으로 형상화해왔다. 양화와 한국화,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 머물지 않고, 색면과 세필을 중첩하면서 독창적인 한국 채색회화의 성채를 구축했다.
전시장 3층에 설치된 27폭짜리 대작 <나날들>(The Days)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김보희 작가.
특히 이번 전시에는 노란 선 그어진 차도와 가로등, 전조등을 켠 자동차, 와인 잔을 앞에 둔 흐릿한 남자, 차창을 지나가는 숫자와 텍스트 새겨진 건물 같은 인공 문명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 수평선과 숲속, 식물의 씨앗 같은 자연의 심연과 세부에 집착했던 작가가, 나이 들수록 자연으로 회귀하는 작가들과 달리 인간의 문명적 풍경에 다가가게 된 것이 특이하다. “날마다 돌아다니는 중문단지 산책로에서 보는 친숙한 도로와 차의 풍경을 보고 새삼 존재감이 느껴졌고 자연스레 그림에 넣게 됐다”는 설명이다. <자화상>이라는 작품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긴다. 흰 자귀나무 꽃의 피는 술과 지는 술을 나무의 열매, 씨앗과 함께 화면에 공존하듯 그려 넣은 이 작품은 피어남과 조락함이 공존하는 꽃의 삶을 화가 자신의 삶에 빗대어 은유한 그림처럼 다가온다. 7월12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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