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서 만난 박은태 작가. 출품작 가운데 가장 큰 500호짜리 아크릴 그림 <철골 5>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단면이 추상화돼 드러나는 단적인 모양이 격자”라며 “그리고 싶었던 격자 도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닥 공사 장면을 큰 화폭에 담고 보니 노동자들이 부품처럼 배치된 회로도 기판 같은 그림이 됐다”고 말했다.
“이건 작품이야. 딱 몬드리안 추상 그림인데?”
2017년 4월 어느 봄날.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작업실 근처의 상가건물 공사장을 지나가던 리얼리즘 화가 박은태(59)씨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시각적 환상을 겪었다. 쇠파이프를 볼트로 결합해 격자형으로 뼈대를 짜고 천을 두른 공사장 비계(속칭 아시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본 순간, 20세기 추상회화 거장 몬드리안의 작품이 불쑥 환영이 되어 나타났다. 유명한 몬드리안의 명작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콤퍼지션)>이 비계 위에 스르르 내려앉아 스며들더니 작품으로 변신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 비계의 파이프 격자 구조가 몬드리안 특유의 분할된 윤곽선과 꼭 닮았어요. 색만 채우면 딱 콤퍼지션이더라고요. 일단 사진을 찍고 집에 가서 사진 프린트를 보며 그림을 구상했지요. 사실 추상의 허상에 대한 반감 같은 게 있어 뒤틀고 싶은 마음이 앞섰지만요.”
작가가 환상 체험을 떠올리며 열흘 만에 쓱싹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작품이 바로 <몬드리안 비계>다. 이달 4일부터 서울 종로구 서촌 효자동 화랑 인디프레스에서 열리고 있는 박씨의 아홉번째 개인전 ‘천근의 삶’에서 만날 수 있는 대표작 중 하나다.
<몬드리안 비계>. 작가가 2017년 작업실 인근 공사장의 격자 모양 비계 설치물에서 거장 몬드리안의 추상작품 <콤퍼지션>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이다. 이후 지금까지 이어진 공사장 연작의 출발점이 됐다.
실제 <몬드리안 비계>를 보면, 격자형 비계 천막에 몬드리안의 삼원색을 채워 넣었지만, 추상화 원작과 달리 위태롭고 불안하다. 비계를 구성한 쇠파이프와 이를 딛고 작업 중인 노동자 모두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사선 구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깔끔하고 냉혹한 색면의 구조가 기울어진 파이프선과 노동자의 자세와 맞물리면서 여전히 힘겨운 노동 현실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듯하다.
사실 이번 전시는 작가에게는 큰 도전의 자리에 가깝다. 공단 노동자 출신으로 지난 20여년 동안 이 땅의 소외된 사람들과 그들 주위의 풍경을 그려온 민중미술 작가인 박씨는 이번 전시에서 기하학적인 색면추상을 과감히 노동 현장의 묘사에 끌어들이는 파격을 감행했다.
<몬드리안 비계> 외에도 박씨가 <철골> 연작으로 명명한 신작들은 2018년부터 1년여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보금자리 아파트 건축 현장과 안산 공단 등을 돌며 포착한 공사판을 소재로, 여태껏 국내 노동 미술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구도와 짜임새를 보여준다. 격자형의 공사장 바닥과 철골 뼈대가 화면 전체의 배경이 되고, 추상적인 격자로 단순화한 공사 현장에서 꾸물거리듯 작업하는 작은 노동자 군상의 모습이 그 안에 점점이 박힌 시점으로 배치된다.
2020년작 <철골-비계>(부분). 서울 마포구 상암동 박영석기념관 공사장의 난간과 작업 중인 노동자들을 관찰해 그린 작품이다. 건물의 벽면과 바깥의 허공을 비슷한 방식으로 덧칠해 허공이 벽에 붙어서 연속되는 벽처럼 보이고 노동자들은 창살 같은 비계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준다.
출품작 가운데 가장 큰 500호짜리 작품 <철골 5>는 가로·세로의 길이가 각각 3m와 2m를 훌쩍 넘는 대작인데, 정연하게 격자로 구획된 아파트 바닥면에서 노동자들이 철근망 사이로 배선과 통신선을 설치하는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본 구도로 그렸다. 지난해 그린 <철골 4>는 기하학적인 공간들로 구획되고 철근이 비죽 솟은 아파트 바닥면을 배경으로 합판과 패널을 붙이는 노동자의 작업 모습을 담았다. 갈라진 바닥면마다 여러 색조가 어우러져 색면추상화 같은 인상을 주는 작품인데, 추상적 조형성을 부각한 박은태 화풍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019년작 <철골 4>. 기하학적인 공간들로 구획되고 철근이 비죽 솟은 아파트 바닥면을 배경으로 합판과 패널을 붙이는 노동자들의 작업 모습을 담았다. 갈라진 바닥면마다 여러 색조가 어우러져 색면추상화 같은 인상을 주는 이 작품은 추상적 조형성을 부각시킨 박은태 화풍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거대한 격자형의 철골 구조와 어지럽게 엉킨 배선이 주로 등장하지만, 그림의 본질은 여전히 사람이 움직이는 노동 현장의 일거수일투족과 세밀한 풍경을 수작업으로 담아낸 것이다. 노동자 출신이 아니면 포착할 수 없는 철근 부양, 비계 사이 자재 운송 등의 작업을 작가는 관찰과 연출이란 과정을 통해 분석적으로 재현했다.
2020년작 <철골-H(에이치)빔>. 경기도 안산의 공장 건설 현장에서 비 오는 날 포착한 철골조 뼈대 공간의 풍경을 그렸다. 붉은빛과 보랏빛이 뒤섞인 격자형 철골의 색감이 강렬하다. 철골의 격자가 비치는 아래 바닥 웅덩이엔 빗방울이 떨어져 동심원 파문이 퍼지고 그 위 철골 대를 노동자 한 사람이 줄을 잡고 위태롭게 지나간다.
그는 “21세기 자본주의가 추상화된 가장 단적인 모양새가 격자”라며 “격자를 마음껏 그려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말은 색면과 선에 대한 작가의 추상적 욕망이자, 이런 추상화된 자본의 구조 속에서 갇혀 분투하는 노동자들의 존재를 더욱 돋보이게 표출하려는 의지로도 읽힌다.
작은 크기로 묘사되지만, 뚜렷한 몸짓과 떨림의 기운을 담은 노동자들의 모습은 이런 세상의 구조를 만드는 주역이면서도 자신들이 축조한 구조에 가리고 갇히는 소외의 대상이라는 양면성으로 비친다. 추상적 배경이 인물보다 도드라진 출품작들은 오늘날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적 상황에 대한 작가의 회화적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25일까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박은태 작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