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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07 09:07 수정 : 2019.04.08 15:04

〔토요판〕 권오영의 21세기 고대사
⑪ 페르시아 문화와 한반도 (상)

고구려 돌방무덤의 천장 축조방식
중국 아닌 페르시아 건축물 닮아
‘산성-평지성 세트’로 구성된
고구려 도성도 페르시아와 유사

경주 왕릉에서 나온 유리잔 등
신라에도 곳곳에 페르시아 흔적
고대 실크로드로 교류 많았을 것

나무 한 그루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새 한 쌍을 배치한 문양은 페르시아에서 유래했다. 위는 경주박물관 안압지관 앞에 있는 석조물, 아래는 아제르바이잔 바쿠 국립박물관에 있는 석조물이다. 권오영 교수 제공
다른 국가나 민족에게 악감정을 품을 때는 대개 그들에게 피해를 입은 과거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그런 일이 전혀 없는데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적개심을 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건 무지에서 비롯된다. 얼마 전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란에 대한 이미지를 물어본 적이 있다. 호메이니, 악의 축, 테러, 차도르와 히잡 등의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아무런 이미지 없음”이란 답도 나왔다. 유일하게 페르시아라는 ‘기특한’ 답도 있었으나, 이 답 뒤에는 ‘페르시아의 영광’ 등의 이미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 <300>에서 드러난 부정적 이미지가 있음을 곧 알게 되었다. 한국 대학생들이 이란에 대해 품고 있는 감정은 부정적 이미지 일색인 셈이다. 매스컴은 여기에 기름을 부어서 ‘중동축구’, ‘침대축구’란 신조어를 만들어낸다. 아랍인과 이란인이 다른 종족이며, 전자가 대개 수니파, 후자가 시아파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알카에다와 시아파는 무관하며, 다에시(이슬람국가(IS)에 대한 아랍권의 명칭) 격멸전의 선봉에 선 군대가 시아파 동맹이란 점도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란에 대한 우리의 무지는 무관심에서 나온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서울로’가 있고,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한복판에 ‘테헤란로’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란에서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대장금>(이란에서는 <장금이>로 소개됨)과 <주몽>이 공전의 히트를 친 사실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페르시아와 고대 한국이 서로 교류하였음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이런 내용의 강의를 들을 기회는 좀처럼 얻기 어렵다. 대학에서 서양사 관련 강의를 이수한 학생들도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아시아나 이슬람 세계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한 형편이니 일반 국민에게 이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도 든다. 한국사에만 편중되어 균형을 잃은 아시아사, 유럽인의 눈에 의한 세계사 교육이 낳은 커다란 폐해이다.

페르시안 커트 글라스도 고대 동북아시아 유적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왼쪽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이란국립박물관, 경주 황남대총, 오사카 안칸릉 출토 복제품과 원본. 권오영 교수 제공

사산조 페르시아의 커트 글라스(왼쪽)과 경주 천마총에서 나온 커트 글라스. 권오영 교수 제공
이란에 대한 무지와 오해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필자 역시 10년 전만 하더라도 이와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필자가 생각하는 한국 고대사 연구의 공간적 범위는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가 전부였다. 간혹 북아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와 고대 한국의 관련성을 주장하는 강연이나 발표회를 듣고 나면 호사가의 지식 자랑 정도로 치부할 뿐이었다. 그런데 전혀 내키지 않는 상태에서, 그것도 타의에 의해 참여하게 된 2009년 2월의 페르시아 답사는 필자의 공부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지금은 없어진 인천~테헤란 직항의 이란항공을 타고 10시간이나 걸려 도착한 테헤란의 길거리는 평온하였고, 시민들은 친절하였으며, 한국에서 온 우리들을 진심으로 환영하였다. 그 전까지 지니고 있던 이란에 대한 선입견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영화 <300>은 미술적 완성도와 영상미는 높을지 모르지만 노골적인 인종주의를 드러내고 있는 점이 문제다. 악의 축으로 묘사된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는 피어싱을 한 흑인처럼 묘사되어 있다. 페르시아와 그 동맹군들은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간혹 아시아 사람처럼 묘사된다. 레오니다스 왕을 비롯한 스파르타의 용사들은 한결같이 잘생긴 용모에 근육질, 그리고 조국에 대한 충성심, 동료애와 용기로 가득 차 있다. 스파르타 여성들은 정숙하고 현명하지만, 페르시아의 여성들은 약에 취한 듯 하렘에서 흐느적거린다. 영화 제작자가 선호하는 대상과 혐오하는 대상을 너무도 선명히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독한 백인 우월주의 영화에 아시아 사람인 한국인이 환호하는 장면은 어이가 없다.

기원전 6세기 중엽, 이란 남부에 해당되는 파르스의 키루스(Kyrus, Cyrus. 구약에서는 고레스)가 북부의 메디아를 통합하여 세운 아리안족의 왕조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다. 그의 일생에 대해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투스는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는 어느 날 자신이 제일 사랑하는 만다네 공주의 소변이 세계를 뒤덮는 꿈을 꾸게 된다. 해몽가들은 공주가 낳은 자식이 세계를 지배할 길조라고 하지만, 직계가 아닌 외손자에게 권력이 넘어갈까 두려워한 왕은 속국인 파르스의 소군장인 캄비세스 1세에게 공주를 시집보낸다. 몇 년이 지난 뒤 또다시 꿈을 꾸는데 이번에는 공주의 아랫배에서 나온 포도넝쿨이 세계를 뒤덮는 꿈이었다. 해몽가들은 공주가 세상을 지배할 왕자를 잉태하였다고 해석하였다. 아스티아게스는 갓난 외손자를 죽이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장성한 외손자 키루스는 외할아버지의 나라인 메디아를 병합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게 된다.

이 이야기는 김유신의 여동생 보희가 꿈에 서형산에 올라 소변을 보니 경주가 다 잠길 정도였는데, 이 꿈을 비단치마 한 벌에 동생 문희에게 팔면서 태종 무열왕의 왕비가 될 운명이 동생에게 넘어갔다는 설화와 아주 유사하다. 문희는 김춘추, 곧 태종 무열왕과 혼인하게 됨으로써 신라의 왕비가 되었다. 그녀가 낳은 아들(문무왕)과 손자(신문왕)가 계속 왕위를 계승하였고, 그 뒤에도 그 후손들이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

이란 파사르가데에 있는 고대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 무덤. 기원전 6세기에 활약한 키루스 왕은 정복된 국가와 민족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등 관용 정책을 폈다. 그는 바빌로니아에 끌려와 있던 유대인을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권오영 교수 제공

키루스 왕의 관용 정책을 적어놓은 이른바 ‘키루스 실린더’. 영국 런던의 브리티시박물관에 보관돼 있으며, 뉴욕 유엔본부에는 복제품이 있다. 사진은 키루스 실린더의 원본. 권오영 교수 제공
위대한 페르시아 왕 키루스

키루스는 외할아버지에게 보복하지 않고 그의 통치권을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이어서 리디아(현재의 터키 지역)를 합병하였고, 당시 최대 도시국가였던 바빌로니아(현재의 이라크와 그 주변)를 지혜를 써서 함락하였다. 키루스는 당시 중근동의 다른 왕들과는 완전히 다른 사고를 지녔다. 보복이 아닌 관용으로 통치한 것이다. 그의 명령은 원통형 모양의 점토에 새겨졌는데,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패전국 주민의 생활을 보장하며, 포로로 잡혀와 있는 자들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다는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세계 최초의 인권선언으로 평가받는 이 키루스 실린더는 현재 런던의 브리티시박물관에 전시 중이고,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복제품이 뉴욕의 유엔본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칙령에 따라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왔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키루스는 성전을 건설할 자금까지 지원해 주었다. 그 결과 키루스는 유대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으며, 구약에서는 “여호와가 기름 부어 세우신 자”로 칭송되기에 이르렀다.

인권과 관용의 상징인 키루스의 무덤은 자신이 세운 최초의 왕궁인 파사르가데 주변에 있는데, 그의 유언에 따라 아담하게 축조되었다. 훗날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이 무덤에 왔을 때, 돌에 새겨진 문구(“나는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이다. 그대 젊은이여,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지만 인생은 빈손으로 돌아가는 법, 나의 영원한 잠을 방해하지 말구려.”)를 보고서 도굴을 포기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키루스가 나라를 세우고(기원전 539년 무렵), 다리우스가 페르세폴리스를 건설하고(기원전 518년), 크세르크세스가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군과 전투를 치르고(기원전 480년), 알렉산더에 의해 멸망당한 시기(기원전 330년)는 한국사에서 고조선이 발전하던 시기이다. 페르시아의 방계 일파가 세운 파르티아(기원전 248년~기원후 226년)는 위만조선부터 삼국시대 초기에 해당된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를 정통으로 계승하였다고 주장하며 새로 등장한 사산조 페르시아(226~651년)는 삼국의 전성기에 해당된다. 이란의 이런 나라들이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적어도 2009년 2월까지도 필자는 양자가 무관하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란 답사가 시작되자마자 과거의 선입견은 무참히 깨지기 시작하였다. 우선 고구려 무용총의 벽화에 표현된 파르티안 샷의 문제이다. 말을 달리며 허리를 돌려 추격해 오는 적군을 향해 활을 쏘는 파르티안 샷은 기마민족의 전유물이지만, 그 이름에서 보듯 파르티아와 관련되어 있다. 고구려 돌방무덤 중 규모가 큰 것들은 벽석 위에 돌을 올리면서 천장을 만들 때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가공한 석재를 겹쳐 쌓으면서 모를 줄여나가야 하는데,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볼 때 평행하게 줄이는 방법, 삼각형을 띠면서 줄이는 방법, 그리고 양자가 혼합된 형태 등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귀접이 방식으로 좁혀나간 말각조정형 천장은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마치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듯한 구조이다. 문제는 천장을 쌓는 이런 방식이 중국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이란의 건축물에 흔하다는 사실이다. 평지성과 산성을 하나의 세트로 묶어서 도성을 방어하는 방식은 고구려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에서는 보편적인 형태이지만 중국에는 없다. 그런데 페르시아의 왕궁과 왕성들은 하나같이 평지성과 산성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고 있었다. 키루스가 건설한 파사르가데 주변에는 왕궁을 보호하는 산성이 있으며, 사산조 페르시아의 칼레 도흐타르, 비 샤푸르 역시 마찬가지다.

평안남도 남포시 용강에 있는 고구려 고분 쌍영총의 무덤방의 천장을 아래에서 쳐다본 모습. 들여쌓기 방식으로 쌓은 말각조정식 천장이 우물 내부처럼 보인다. 이런 방식은 페르시아 문화권 건축물에 흔하다. 권오영 교수 제공

다양한 지역에서 출토된 페르시아 계통의 봉수병(오이노코에). 왼쪽부터 시리아 출토, 사산조 페르시아, 이란국립박물관 소장, 경주 황남대총 출토 유리병이다. 권오영 교수 제공
유럽과 서아시아에 널리 퍼진 뿔잔, 한국에서는 신라에서만 나왔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유럽 켈트족, 파르티아, 창녕 교동, 신라(출토지 불명) 것이다. 권오영 교수 제공
경주에 남은 페르시아 연주문

경주의 왕릉에서 발견된 수많은 유리 용기들은 로마계와 페르시아계로 나뉜다. 전자는 지금의 이집트와 시리아, 박트리아(우즈베키스탄 남부와 아프가니스탄 북부) 등지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후자는 사산조 페르시아 영토 어딘가에서 만든 것들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안압지관 앞에는 큰 원의 원주를 따라 작은 구슬 모양의 원을 빼곡히 배치한 연주문이 새겨진 미완성 석조물이 놓여 있다. 원 안에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좌우에 공작처럼 생긴 새 한 쌍이 마주 보고 있다. 전형적인 사산조 페르시아의 무늬이다. 확실히 동남아시아 기원의 물품과 무늬가 많은 백제와 달리, 고구려와 신라에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관련된 것이 많다.

규슈 앞바다에 떠 있는 오키노시마라는 작은 섬은 일본에서 한반도를 거쳐 중국으로 가는 항해의 안전을 보호해주는 여신을 모신 곳이다. 이곳에서 치러진 제사에 사용된 제기 중에는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제작한 유리 완이 있다. 후쿠오카 시내의 고로칸(외국 사절단이 묶는 관청)에서는 페르시아-아랍의 도기와 유리가 발견된다. 오사카의 안칸(安閑)릉이라고 불리는 한 전방후원분에서는 커트 글라스라고 불리는 일종의 페르시아 유리가 출토되었다. 나라현 니자와센즈카 126호분은 신라에서 이주한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로마 유리와 페르시아 유리가 세트를 이루며 부장되어 있었다. 일본 나라시대의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는 쇼소인(正倉院)에는 페르시아 유리, 연주문이 베풀어진 양탄자가 보관되어 있다.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수많은 사실이 이란을 답사하면서 비로소 하나로 꿰어지기 시작하였다. 페르시아를 출발하여 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고구려, 신라, 왜로 이어지던 장대한 실크로드가 갑자기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로소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귀국하는 필자의 마음은 복잡하고 한편으로는 바빠지기 시작하였다. 실크로드를 통한 유라시아 동서의 거대한 교류의 흐름을 제대로 포착할 수만 있다면 그 안에서 한국 고대사의 역동성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품게 된 것이다. 그 화두를 붙잡고 지금까지 10년째 조금씩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다음 호에 계속)

▶ 권오영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직접 유적을 발굴하는 고대사 학자로, 역사학과 고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자연과학과 공학적 연구를 역사 탐구에 활용하는 학제 간 융복합 연구에 관심이 많다. 최근 연구 성과를 토대로 고대 한반도가 주변국들과 얼마나 긴밀히 연결돼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고대사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한다.

말을 타고 몸을 비틀어 활을 쏘는 이른바 ‘파르티안 샷’이 그려진 고구려 고분 무용총의 벽화. 파르티안 샷은 페르시아 계통의 파르티아에서 전래된 활쏘기 방법이다. 권오영 교수 제공

신라계 귀족이 묻힌 일본 나라현 니자와센즈카 126호분에서 출토된 유물들. 신라의 금제품과 로마와 페르시아의 유리 제품(오른쪽)들. 박천수 경북대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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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권오영의 21세기 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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