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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05 18:59 수정 : 2019.08.07 15:24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 별세
유신·5공 시절 두 차례 해직 고초
20대 초 만난 함석헌에 큰 감화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장 지내
‘부분과 전체’ 등 과학 고전 번역

도올, 김숙희 전 장관과 형제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

군부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에 참여해 두 차례나 해직의 고초를 겪은 원로 과학자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가 4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92.

1965년 고려대 화학공학과 교수로 부임한 고인은 유신 시절인 1975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1차 해직됐다. 김 교수는 당시 기독교수협의회 회장을 맡아 당연직으로 기독학생운동총연맹 이사장을 겸하고 있었다. 이철, 유인태, 황인성 등 민청학련 구속자 상당수가 기독학생운동총연맹 소속이었다. 유신 말인 1979년 복직했으나 1년도 안 돼 다시 대학에서 쫓겨났다.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기 사흘 전인 1980년 5월 15일 나온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에서다. 전두환 신군부가 정치에서 손을 뗄 것을 요구하는 이 성명에 그를 포함해 과학자 7명이 참여했다. 해직은 고인과 당시 성균관대에서 가르치던 송상용 한림대 명예교수 둘이 당했다.

1984년 복직한 고인은 한 인터뷰에서 “1980년 해직만 안 됐어도 지금 저는 한약에서 에센스를 추출해 신약을 개발하는 쪽에서 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게 유기화학자로서 제 꿈이었다”고 밝혔다. 고인은 서울대 화학공학과에서 석사까지 마친 뒤 미국 텍사스 A&M대에서 유기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 형(고인)이야말로 20세기 한국에서 과학을 과학으로만 보지 않고, 종교와 철학과 과학 사이에 다리를 놓은 한국 최초의 사상가이다.” 고인의 동생인 도올 김용옥의 말이다.

화학자인 고인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시도한 데는 함석헌 선생의 영향이 컸다. 1927년 목포에서 태어나 천안에서 자란 고인은 1949년 서울 종로 와이엠시에이에서 열린 ‘함석헌의 성서강해’에서 함 선생을 처음 만나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신을 향한 태도부터 사회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까지, 유기화학을 제외한 모든 것을 함 선생에게서 배웠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서울대를 나와 천안농고 교단에 서던 시절에는 함석헌의 무교회주의 사상을 따른다는 이유로 다니던 교회에서 출교당하기도 했다. 함 선생 별세 뒤에는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장과 발행인도 지냈다. 대우재단이 1986년 설립한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을 맡아 수년간 학술 총서 발간 및 학술연구지원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계간지 <과학사상>(1992년 창간) 편집인을 맡아 과학대중화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고려대 화학공학과 교수에서 물러난 뒤에는 ‘과학과 종교의 통합’이라는 주제를 파고들었다. 작년엔 92살의 나이로 4회 유미과학문화상을 받기도 했다. 유미과학문화재단(이사장 송만호) 쪽은 수상자 선정 사유를 이렇게 밝혔다. “김 명예교수는 과학 문화의 확산에 앞장섰고, 과학과 인문학, 종교, 철학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일을 연구했다."

<과학 · 인간 · 자유>(1979), <혼돈과 질서>(1998),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2005) 등의 저서를 남겼고 과학 고전 <부분과 전체>(하이젠베르크 저) <우연과 필연>(자크 모노 저) 등을 번역했다. 유족으로는 동생 숙희(전 교육부 장관), 용옥(한신대 석좌교수)씨와 아들 철재, 인중(숭실대 명예교수), 형중(전 서강대 평생교육원 부원장)씨가 있다.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이며 발인은 7일 오전 5시30분이다. (02)923-4442.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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