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8년에 완공된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은 프랑스혁명 직전에 시민들과 수비대 병사들의 우애가 싹튼 곳이기도 하다. 시민들에 대한 발포 명령을 거부한 병사들이 수도원 감옥에 갇히자 시민들이 감옥을 강제로 열어서 이들을 풀어줬다.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모습. 위키미디어
유학 시절, 파리 14구 주르당 대로의 대학 기숙사촌에 살다가 6구에 방을 얻어 이사했다. 나는 4층인가 5층에서 창문의 유리 한장이 깨진 방을 얻었고, 얼마 뒤 남작부인(baronne)인 주인 할머니가 사온 유리를 직접 갈아 끼운 생각이 난다. 넓고 긴 ‘뤼 뒤 푸르’(rue du Four)와 좁고 짧은 ‘뤼 데 시조’(rue des Ciseaux)가 만나는 집이라서 주소가 ‘푸르 길 16번지’와 ‘시조 길 10번지’였다. 자료를 찾다가 이 건물이 ‘사적’(monument historique)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뤼 데 시조는 ‘가위들의 길’을 뜻하며, 한때 ‘황금가위길’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동네에 ‘우물이 여섯개’(six eaux)가 있었기 때문에 ‘시조 길’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내가 살던 건물인지 맞은편 건물인지 모르겠지만, 간판에 ‘O’를 여섯개(six O) 쓴 상점이 있었다고 한다. 짧은 골목길에 음식점이 몇곳 있었고, 특히 일본식당은 새고기를 굽는 연기를 자욱하게 피웠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기타를 치고 노래를 파는 사람이 돌아다닐 만큼 음식점도 번창했다. 바깥 소리에 신경을 끄고 누워서 남쪽을 보면, 창틀 안에 생쉴피스 교회의 둥근 탑이 알맞게 들어와 오래된 그림을 보는 듯했다.
역사가 일레레는 <파리 길의 역사사전>(Dictionnaire historique des rues de Paris)에서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빵가마(four)를 설치했던 곳이 뤼 뒤 푸르가 되었다고 말한다. 옛날에는 파리의 서남쪽에 있는 이시와 도자기로 유명한 세브르로 가는 길이며, 오늘날 생제르맹데프레 교회 맞은편에서 남쪽으로 난 렌 길(rue de Rennes)과 이 길이 만나는 곳에 빵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중세에는 수도원 밖에 촌(부르)이 생겼고, 촌민이 수도원의 통제를 받으며 살았다. 그들은 영주의 독점 시설물인 포도압착기나 빵가마를 이용하고 사용료(banalité)를 냈다. 100년 전쟁을 끝내고 중세의 봉건제도에서 벗어나고 있던 1470년께에 빵가마를 철거했다.
_________
노르만족 침입 때 약탈당해
뤼 데 시조의 북쪽으로 나가면 오른쪽에 계몽사상가 디드로의 동상이 있는데 중세에는 그 근처에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한다. 디드로 동상과 생제르맹데프레 교회 사이에 있는 생제르맹 대로는 시테섬 동쪽에 있는 생루이섬 남쪽에서 시작해서 콩코르드 다리까지 길이가 3.15㎞에 너비가 30m 이상이다.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이 센강 좌안에서 얼마나 번성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511년에 클로비스가 죽은 뒤에 네 아들(티에리·클로도미르·실드베르·클로테르)이 프랑크 왕국을 나눠 가졌다. 셋째인 실드베르는 에스파냐의 사라고사에서 서고트족과 싸우고 황금십자가와 에스파냐의 순교자 비센테(304년 순교)의 옷을 가지고 542년에 돌아왔다. 그는 곧바로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을 세웠다.
센강 강북의 수도원들은 북쪽의 언덕과 산에서 흐르는 여러 갈래의 시냇물이 모이는 질척한 땅을 메우고 세웠다. 강남에서도 센강으로 흘러드는 비에브르천(또는 고블랭천)의 오른쪽은 늪지였기 때문에 서쪽의 풀밭(des prés)에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은 중세의 거리 30곳과 그르넬 벌판의 일부에 사법권을 행사했다. 수도원 소속 법원에 판사·검사 한명씩, 서기 두명, 군대, 죄인 공시대(pilori, 죄인을 묶어두던 곳), 감옥을 가졌다.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남쪽 측면. 위키피디아
558년 12월23일에 완공한 수도원 교회는 금빛찬란했기 때문에 ‘황금빛 생제르맹 교회’(Saint-Germain-le-Doré)라 부르고, 황금십자가와 비센테 성인의 옷을 모셨다. 실드베르는 이튿날 죽었고, 교회 안에 묻혔다. 초대 수도원장인 제르맹 주교는 80살로 576년에 죽어 교회에 묻혔다. 수도원의 이름이 이 주교와 관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고베르트 왕이 생드니 수도원을 지을 때까지 이 교회는 메로빙 가문의 무덤이 되었다. 9세기에 노르만족은 파리를 네번(845, 856, 861, 885년) 침공하고,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을 약탈하고 불질렀다. 200명의 수도사가 살 만큼 규모가 큰 수도원답게 금도금한 청동판으로 지붕을 이었으니, 약탈자들이 그저 지나칠 리 없었다. 1000년께에 교회를 다시 지었다. 13세기에 루이 9세가 교회 주위에 성모 예배당, 수도사 식당, 열주회랑, 수도사 숙소, 회의실, 참사 회의실을 잇달아 지었고, 후세에는 방문자 숙소와 도서관도 지었다.
_________
두려움에 반혁명분자 학살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감옥인 ‘아베이 감옥’(prison de l'Abbaye)은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1522년에 옛 건물을 헐고 새로 지었다. 그리고 1635년에 수도원 남동쪽 담장 밖에 3층 건물을 새로 지었다.
1667년에 루이 14세는 파리 치안총감직을 신설하고 라 레니를 임명했다. 라 레니는 도둑이 숨을 곳을 없애려고 파리에 가로등을 설치한 인물이다. 1674년에 루이 14세는 오직 공권력만이 사법권을 행사하라고 명령했다. 아베이 감옥은 명령불복·군무이탈의 죄를 지은 장교와 사병을 가두는 왕립감옥이 되었다.
1789년 5월에 베르사유에 모인 전국신분회가 6월17일에 국민의회를 선포하고, 20일에 의원들이 헌법 제정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는 죄드폼의 맹세(일명 테니스코트의 서약)를 하자, 루이 16세는 군대를 파리와 베르사유에 집결시켜 구체제를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프랑스 수비대 병사들은 평소 파리 주민들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부족한 급료를 보충하려고 휴무일에는 민간인과 어울려 일하면서 용돈을 벌었는데, 어찌 민간인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있겠는가? 군당국은 발포 명령을 무시한 병사 11명을 아베이 감옥에 넣었는데, 6월30일에 파리 주민들이 아베이 감옥을 강제로 열어서 병사들을 구해주고 ‘우애’를 과시했다.
반혁명분자들의 역공을 우려해서 1792년 9월 저녁에 감옥의 죄수 등 1천명 이상을 살해한 ‘9월학살’을 그린 그림. 출처는 영국 작가 타이 홉킨스의 책 <옛 파리의 지하 감옥>. 위키피디아
제헌의회는 최초의 성문헌법을 제정하고 1791년 9월30일에 물러났다. 최초로 민주주의 헌법 절차를 따라 선출한 입법의원들이 10월1일부터 법률을 제정하기 시작했지만 국내외에서 뜻하지 않은 일이 계속 일어났다. 더욱이 1792년 4월 하순부터 대외전쟁에 휩쓸렸다. 파리 투사들은 전쟁에 희망을 건 왕을 더 이상 믿지 못했으며 6월20일에 튀일리궁에 난입해서 왕을 위협했다. 전방을 지키던 라파예트가 왕을 보호하려고 전방의 근무지를 이탈해서 파리에 다녀간 뒤, 투사들은 라파예트를 8월10일 이전에 체포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입법의회가 말을 듣지 않자 8월10일에 ‘제2의 혁명’을 일으키고 13일에는 왕을 탕플 감옥에 가두었다.
파리 주민들은 외적이 파리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반혁명분자들이 가족을 몰살할지 몰라 두려워서 전선으로 떠나기 전에 예방조치를 시작했다. 그들은 9월2일부터 시내의 감옥을 돌면서 1천명 이상을 처단했는데, 아베이 감옥에서만 326명을 처단했다. 생제르맹 대로 33번지의 건물 왼쪽 기둥에서 ‘1792년 9월학살’이 일어난 장소임을 알리는 표지판을 확인할 수 있다.
파리의 지하철 10호선은 1923년부터 크루아루주(붉은 십자가)역에서 오스테를리츠역까지 오갔다. 그러나 10호선을 서쪽 센강 너머로 연장하는 동안 1939년부터 ‘붉은 십자가’역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오늘날 10호선과 12호선이 만나는 세브르바빌론역에서 마비용역 쪽의 지하에 유령처럼 남아 있다. 그 위에 ‘크루아루주 오거리’가 있었다. ‘붉은 십자가’는 국제적십자위원회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을 세우기 전부터 근처에는 정절과 모성의 상징인 이시스 신전이 있었다. 교회에 다니는 아낙들은 미사가 끝난 뒤 이시스 상으로 몰려가 기도했다. 수도원장은 고대 이집트·그리스·로마의 다신교 전통을 뿌리 뽑으려고 이시스 상을 없애는 대신 ‘붉은 십자가’를 세웠다. 1514년에 수도원장 브리소네는 ‘붉은 십자가’를 뤼 뒤 푸르의 끝에 있던 ‘말라드르리’(Maladererie) 병원 앞으로 옮겼다. 이 병원은 한센병자나 악성 전염병 환자를 돌보던 곳이었다. 그렇게 해서 ‘붉은 십자가 오거리’가 생겼다. 1650년에 ‘붉은 십자가’를 철거한 뒤 ‘푸르 오거리’라고 부르다가 혁명기에는 ‘보네루주 오거리’(Carrefour du Bonnet-Rouge, 붉은 프리기아 모자의 거리)라 불렀다.
_________
유명인들의 단골 카페 ‘레 되 마고’
옛날에는 갤리선의 노 젓는 형벌
에 처하거나 지방으로 유배하기 전에 죄인을 말뚝에 묶어놓고 온갖 조롱·저주를 견디게 만들었다. 그를 불쌍히 여겨 노잣돈을 던져주는 이도 있었다. 이 말뚝을 죄인 공시대라고 불렀다. 왕의 죄인 공시대는 강북의 레알(Les Halles) 시장 근처에 있었다. 수도원의 죄인 공시대는 혁명 뒤에 원래 이름을 찾은 ‘붉은 십자가 오거리’에 있었다. 오거리에는 행인이 많았기 때문에 삯마차가 줄지어 서 있었고, 행상인이 소리치며 다녔다. 공권력에 불만인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기도 했다.
이 오거리에는 2005년부터 조각가 세자르(1921~1998)의 ‘상토르’(켄타우로스)가 서 있다. 2006년 7월9일에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오거리 이름을 ‘미셸드브레 광장’으로 바꾸었다. 드브레(1912~1996)는 1958년부터 법무장관을 지내면서 공화국 헌법의 기초를 세웠고, 1959년에 총리가 되었다. 샤를 드골 시대의 영광을 되살리고 싶은 정치인 시라크가 드브레에게 광장을 바쳤다.
생제르맹데프레 교회 앞 광장 입구에 있는 카페 ‘레 되 마고’. 1873년에 문을 연 이 카페는 앙드레 지드, 장폴 사르트르 등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위키미디어
생제르맹데프레 교회 앞 광장에서는 재주꾼이 카페 손님과 행인에게 재주를 판다. 모퉁이의 카페·레스토랑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의 바깥 자리는 일등 관람석이며, 천년의
세월을 이고 있는 고색창연한 교회도 잘 볼 수 있다. 카페 안쪽 네모기둥의 두 면에 중국인형을 하나씩 붙여놓았는데, 그들이 곧 카페의 이름이 되었다. 19세기 초, 근처에서 중국의 진기한 물건과 비단을 팔던 가게가 1873년에 이 카페 자리로 옮길 때 가져온 인형이다.
앙드레 지드, 장 지로두, 파블로 피카소, 루이 아라공, 장폴 사르트르, 시몬 보부아르, 페르낭 레제, 자크 프레베르, 어니스트 헤밍웨이 같은 문인·철학자·예술가들이 단골손님이었다. 오늘날에도 카페에서 ‘저술가들의 월요일’(Lundi des écrivains) 행사를 주최하고, 1933년부터 ‘되 마고 상’을 매년 1월 마지막 화요일에 수여한다. 언론인·작가 제롬 가르생의 <시드의 마지막 겨울>(Le dernier hiver du Cid)이 올해 수상작이다. 식도락 문학상의 르 로스탕(19세기 극작가) 레스토랑, 여성문학상의 라 클로즈리 데 릴라(라일락 농원) 레스토랑도 6구의 자랑이다. 강북의 2구에 있는 드루앙 레스토랑은 공쿠르상과 르노도(17세기 <가제트 드 파리>의 창간인)상을 발표하는 장소다.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