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슬옹 원장이 주시경 선생 조형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훈민정음> 해례본의 역주 방법론 정립에 관한 연구’.
김슬옹 세종 국어문화원 원장이 지난 7월 연세대 국문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논문이다. 그는 앞서 상명대(2005년)와 동국대(2010년)에서도 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이번이 세 번째 박사 학위다. 첫 박사 논문에선 <조선왕조실록> 자료를 훑어 조선시대 왕실에서도 한글을 꾸준히 사용했음을 밝혔고 두 번째 논문은 ‘맥락을 고려한 국어 생활’을 주제로 다뤘다. 지난 21일 서울 광화문역 근처 사무실에서 김 원장을 만났다.
철도고 1학년이던 1977년부터 한글 운동을 펼쳐온 김 원장은 지금껏 우리말과 우리글을 주제로 86권(단독저술 30권)의 책과 논문 123편을 썼다. 이번 박사 논문에 실린 참고 문헌에도 그가 쓴 책이나 논문 34개가 들어 있다. “제가 그동안 해오던 말을 박사 논문에서 반복하면 의미가 없잖아요. 새로운 방법론과 그에 맞는 자료를 찾느라 논문 작성에 4년이나 걸렸죠. 지도교수님도 제 품격에 맞는 논문을 써야 한다고 강조하셨죠.”
연세대 국문학과 82학번인 그는 모교에서 석사 학위를 따고 97년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수료할 무렵 둘째 아들이 많이 아파 돈을 벌어야 했어요. 박사 논문 제출을 위한 종합시험도 떨어졌고요. 그때 불명예스럽게 그만둔 회한을 이번에 매듭지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끝까지 도전하는 저의 모습이 두 아들에게 가르침이 될 것 같기도 했고요.”
그가 “죽음의 9부 능선을 건너야 쓸 수 있다는 박사 논문” 작성에 세 번째로 나선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단다. “연희전문과 연세대 교수를 지낸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의 학맥을 잇고 싶었어요. 제가 고교를 졸업 뒤 몇 개월 철도 공무원을 하다, 뒤늦게 연세대 국문학과에 간 것도 외솔 선생 영향이 커요.”
그는 이번 논문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의 역주사를 검토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역주 방법론도 제시했다.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 3년 뒤인 1446년에 펴낸 해례본은 오랜 세월 묻혀 있다가 일제 강점기인 1940년 원본이 극적으로 발견돼 현재 간송미술관이 보관하고 있다. 천지인과 음양오행 사상으로 한글 창제 원리를 밝힌 이 책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됐다. 그는 논문에서 해례본의 첫 역주서인 <훈민정음 언해본>(1459)과 1940년 원본 발견 이후 나온 27종 현대 역주서의 구성과 내용을 상세히 검토했다.
올해로 원본이 나온 지 80년이지만 해례본 연구 성과를 반영하는 역주본 발간에선 별다른 진전이 없다는 게 김 원장의 생각이다. “홍기문의 첫 현대 역주서(1946)는 해례본에 출처가 없는 중국 쪽 문헌 전거를 세밀하게 고증해 의미가 큽니다. 하지만 전문가도 읽기 힘든 난해한 문체여서 쉬운 글말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는 훈민정음의 언문일치 정신을 지키지 않았죠. 홍기문과 다른 측면에서 역주를 발전시킨 저자는 박지홍(1984년 출간), 강신항(2003), 박종국(2007) 선생입니다. 하지만 이들도 홍기문 첫 역주서의 긍정성과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어요.” 그는 해례본 역주의 어려움을 이렇게 말했다. “한자로 쓰인 해례본은 매우 수준 높은 언어학과 철학, 문자과학, 음악학을 아우르고 있어요. 제대로 역주하려면 성리대전 등 중국 문헌을 통달하고 서양 문자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갖춰야 합니다.”
그는 5년 전에 처음으로 간송미술문화재단과 교보문고가 발간한 <훈민정음 해례본 복간본> 간행 학술 책임을 맡아 해례본을 현대문으로 옮기고 해제까지 썼다. 그는 이번 논문이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의 의미도 있다고 했다. “제가 번역하며 역주를 달지 않았거든요. 어떤 번역이든 역주가 있어야 합니다. 역주는 번역에 대한 책임이거든요. 이번 논문에서 세운 역주 방법론으로 내년에는 해례본 역주서를 낼까 합니다.” 그는 이번 논문이 “해례본 연구를 종합 정리한 것으로 훈민정음과 해례본 연구에서 또 다른 기틀을 마련했다”고 자평했다. “해례본은 한문이라 번역이 중요해요. 역주가 제대로 돼야 해례문에 담긴 가치나 정신을 제대로 이어갈 수 있어요.”
최근 ‘훈민정음 해례본’ 연구로
연세대에서 생애 세번째 박사학위
언해본과 현대 역주 27종 분석
“해례본 낱낱이 가르치는 게 꿈”
77년 고1 때 한글운동 뛰어들어
“세종 주시경 최현배 삶 잇고 싶어”
그는 대학을 다닐 때 우리말 ‘동아리’를 널리 퍼뜨린 일로 잘 알려져 있다. 1984년 그의 제안으로 연세대 학생들은 ‘써클 연합회’를 ‘동아리 연합회’로 바꿨다. 초등생 시절 부친에게 직접 천자문을 배운 김 원장은 고1 때 신문에서 천자문에도 없는 어려운 한자를 보고 충격을 받아 한글 운동에 뛰어들었단다. 대학 2학년 때는 재판을 해, 한자 이름 용성을 지금의 한글 이름으로 바꿨다.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바꿨다고 아버지가 개명하고 1년 동안은 저와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의 가장 큰 소망은 대학에서 해례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치는 것이다. “해례본을 가르치는 대학이 다섯 곳 정도입니다. 해례본 전공 교수도 10명이 안 되고요.” 3년 전에 해례본 교육용 책인 <훈민정음 해례본 입체강독본>을 낸 뒤로 1년에 많으면 100여 차례 교사와 학생, 일반인 대상으로 해례본 강의를 하지만 대부분 일회용 강의라 아쉽다고 했다.
김 원장 뒤로 ‘최초 외국인 한글학자’ 호머 헐버트(1863~1949) 조형물이 보인다. 강성만 선임기자
“97년부터 비정규직 교수입니다. 그간 대학교수 임용에서 40여 차례 떨어졌어요.” 지난해 강사법 통과 때는 시간강사를 하던 대학 세 곳에서 강의 중단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나이가 많아 헛된 꿈이라고 생각하지만 교수 임용 꿈을 아직도 못 버리고 있어요. 해례본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 때문이죠.” 국문과나 국어교육과 교수직에 도전하면서 영어 면접도 다섯 차례나 봤단다. “지방의 한 사립대에선 국어학 전공 교수들이 보는 자리에서 외국인 교수가 영어 면접을 하더군요. 그 자리에서 ‘아임 쏘리’(미안합니다)라고 한 뒤 나와 버렸어요.”
그가 지난해 원장을 맡은 세종 국어문화원은 사단법인 국어문화운동본부(대표 남영신)가 운영하는 기관으로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가꾸는 일을 한다. “최근엔 어르신들의 우리말 화법이나 읽고 쓰는 능력을 키우는 교육 사업을 많이 해요. 한글 웃음치료 교육도 하죠.” 그의 저술 중에는 한글 웃음치료를 주제로 한 <웃는 한글>(2018)도 있다. “해례본에서 자음 창제를 오행과 오장(간심비폐신), 오상(인예신의지)과 연결한 것을 활용해 한글을 손뼉 놀이로 만들었죠. 의학적 증명이 된 것은 아니지만 놀이로 한글에 담긴 철학과 과학의 보편적 의미를 새기며 웃으니 건강도 좋아진다는 것이죠. 아이들, 어르신 모두 웃음치료 강의를 하면 좋아해요. 저도 건강을 위해 하루 세 번 한글 소리로 크게 웃습니다. 전임 교수가 되지 못해 이런 일도 할 수 있겠죠.”
그가 한글 운동에 직접 나선 계기는 신문의 한글 홀대였다. 지금은 어떨까. “엄청 좋아졌죠. 제가 창간 주주인 <한겨레> 등 많은 신문이 한글만 쓰고 있잖아요. 70년대만 해도 조사와 순우리말 빼곤 신문이 온통 한자였어요. 지금은 차원이 다를 정도로 좋아졌죠. 대신 영어 남용이라는 문제가 있죠. ‘살얼음’이라는 쉬운 우리말이 있는데 왜 말도 안 되는 ‘블랙 아이스’를 쓰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언택트’(비대면)도 그렇고요. 쉬운 말 쓰기 운동은 영원히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는 한글 운동을 시작할 때와 달리 지금은 “순우리말을 고집하지 않는다”고 했다. “맥락에 따라 쉽고 바르게 소통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는 해례본 강의 외에도 하고 싶은 일이 참 많다. “해례본을 전 세계 모든 언어로 번역해 세계에 알리고 싶어요. 우선 6개 국어(영어,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로 먼저 하려고요. 세종시에 세종 한글 놀이공원도 만들 계획입니다. 한글의 가치와 원칙을 살리고 해례본 방식의 한글 배우기를 구현한 공원이죠. 해례본 방식이란 자음은 ㄱ ㅋ ㄲ와 같이 같은 계열끼리 배우는 것입니다. 지금은 ㄱ ㄴ ㄷ ㄹ ㅁ ㅂ 순으로 배우잖아요. 한글 놀이공원은 제자 원리와 재미있는 동화 방식을 적용한 일종의 한글 디즈니랜드가 될 겁니다. 한글과 한식, 한복, 한류를 함께 가르치는 한문화대학원 대학교 설립도 생각하고 있어요. 현재 대학 설립을 위해 여러 전문가와 힘을 모으고 있어요.”
한글의 위대함은 다른 언어와 차원이 다르다는 게 김 원장의 평소 생각이다. “세계 언어들은 다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말을 이었다. “한글은 직선과 동그라미로만 되어 있어요. 가장 간결한 도형이죠. 그래서 쉽게 쓰고 읽힐 수 있어요. 이런 문자도형을 가진 언어가 없어요. 약자를 배려하는 휴머니즘도 깔렸고요.” 덧붙였다. “세종대왕과 주시경(1876~1914), 최현배 선생은 학문과 실천을 결합하는 삶을 살았어요. 한글연구와 한글보급 운동을 결합했죠. 고1부터 제가 가려고 했던 길이죠. 앞으로도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