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10>

등록 2005-10-13 16:10수정 2005-10-13 16:10

먼하늘가까운바다 <10>
먼하늘가까운바다 <10>
베니, 그가 나를 부르던 그 말이었다
우리는 어느 날 같이 한자를 다른 이름으로
읽는 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공지영

말을 꺼내놓았는데 더 이상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앞 얼굴로 몰려드는 피를 의식하며 나는 중얼거렸다.

“언젠가 네게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어.”

담담하고 당당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나는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지난 7년을,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내려앉았던 빨간 심장을 다 토해 버릴 것만 같았다. 기다렸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새로 휴대폰을 장만하고 나서 그가 당연히 내 전화번호를 모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집 전화번호도 바뀌고, 회사 전화번호도 바뀌고, 한국의 전화번호는 세 자리 국번에서 네 자리 국번으로 바뀌어 버렸는데도 심장은 내 머리를 비웃으며 그렇게 덜컥거렸다. 사무실에서도 집에서도 전화를 받아들고 그 소리의 주인공이 여보세요, 하기까지 전화벨은 고통이 시작되는 신호였었다. 그렇게 혹시라도 기적처럼 그가 전화를 걸어와 베니, 넌 잘 있니? 하고 물으면, 그러면 나는 대답하고 싶었다. 응, 잘 있어. 나는 최홍이고, 나는 씩씩한 여자고, 나는 잘 있어. 준고. 어쩔 수 없이, 안간힘을 다해서, 필사적으로 그렇게 잘 있단다… 그리고 나는 꼭 물어보고 싶었다. 준고, 너는? 하고…

갓 오븐에서 꺼낸 따뜻한 애플파이, 진한 레몬밤 티, 딸기가 그렁그렁한 생크림 케이크, 그리고 선암사의 조용한 뜨락… 파초 잎을 스치는 바람과 연보랏빛 작약 꽃다발 토란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나는 언제나처럼 주문을 외웠다. 어제 연둣빛 트레이닝복을 사면서 나는 이제 이 주문 속에 연둣빛 트레이닝복, 거의 레몬에 가까운 그린빛… 이라는 말을 끼워 넣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젠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홍이 넌 언제나 씩씩해. 난 그렇게 씩씩한 네가 좋아…

준고는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무슨 소리야? 난 고등학교 때부터 허리를 수양버들처럼 낭창하게 꺾으며 기절해 보는 게 소원이었단 말이야. 희고 가늘고 연약하고 말도 가만가만 하고… 난 그런 여자애들 보면 아직도 질투심에 불타오른단 말이야.

나는 마지막에 칸나 같이 그런 여자, 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었다. 칸나는 물론 그런 여자는 아니었다, 라는 의미겠지? 하고 나는 혼자 마음대로 생각해버렸다.

“그런데 물어볼 필요도 없는 거 같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네게 할 말이 있는지도 잊어버렸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베니.”

그가 말했다. 갑자기 먼 서울의 불빛들이 비안개에 덮이는 것처럼 흐릿해졌다. 이노가시라 공원의 새벽안개처럼, 그때 그 쇳내가 날 것 같은 연못의 청동 물빛의 기억이 베니, 라는 그의 말을 따라 주문처럼 내 안으로 조용히 침투해 들어왔다. 베니, 그가 나를 부르던 그 말이었다. 우리는 어느 날 같은 한자를 다른 이름으로 읽는 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약은 일본어로는 샤쿠야쿠, 작가는 사카, 유명한은 유메나, 고속도로는 고소쿠도로, 이건 거의 사투리에 가까운 같은 말 같지 않아? 이게 다른 나라의 언어라는 게 믿어져? 나는 물었다. 그러자 그가 재미있다는 듯이 그렇다면, 최홍은… 베니, 하고 불렀었다. 그때 나는 내 안의 어떤 여성성이 그가 이름을 부르자 깨어나 가만히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그건 내가 홍이라는, 어떤 면에서 중성적인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는 아주 달랐다. 그는 나의 뺨에 어리는 홍조를 느꼈는지 다시 한 번 부드럽게 나를 불렀다.

―베니!

나는 그때 그에게로 다가가 그의 목에 내 팔을 감고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다댔었다. 그때 내 머리칼을 쓸어주던 그의 손길이 살아나려고 한다. 손가락이 내 머리를 빗처럼 훑어 내리던 그 따스하고 생생한 촉감까지 그랬다. 그때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던가, 아니던가. 아마 말했을 것이다. 아마 온 마음을 다해 말했을 것이다. 사랑해, 사랑해, 널 너무나 사랑한다구!

나는 다시 주문을 외우려고 했다. 갓 구워낸 따끈한 애플파이, 진한 레몬밤 티…

“베니, 만약 네가 오해를 하고 있다면 나는 그 오해를 풀고 싶다.”

주문 같은 것은 처음부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다는 듯 그가 다시 말했다. 딸기가 그렁그렁 얹힌 하얀 생크림 케이크, 선암사의 조용한 뜨락… 나는 기어를 올렸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파초잎을 스치는 바람소리, 연보랏빛 작약 꽃다발… 어떤 작가가 그랬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거라고. 그렇지만 그 작가도 모르는 것이 있다. 즐길 수 없는 때도 있다는 것을, 그저 한 사람을 피해가는 것조차 안간힘을 써야만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베니,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하지만 지금은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분명 네게는 닿지 않겠지. 이 우연한 재회가 마지막 찬스란 것만은 알아. 그래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어.”

그는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나 역시 그랬다. 그는 마주치기 위해서, 나는 피하기 위해서.

나는 차를 호텔 입구에 세웠다. 벨보이가 문을 열었다. 안녕히 가세요, 내가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분명 네게는 닿지 않겠지 이 우연한 재회가 마지막 찬스란 것만은 알아”

쓰지 히토나리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

엔진 소리가 낮게 윙윙거리는 차내에서 홍이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언젠가 네게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어.”

홍이는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고, 나는 홍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긴 침묵이 조금씩 두 사람의 마음을 침식해 들어와 날카롭게 잘려나간 빙하의 단면을 깎아내려 갔다.

하지만, 하고 홍이는 생각난 듯 침묵을 깨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혹을 날려버리기라도 하듯 시원스런 말투다.

“그런데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 같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네게 할 말이 있었는지도 잊어버렸어.”

견디기 힘든 나는 베니, 하고 최홍을 불렀다. 그 옛날 우리가 아직 빛의 한가운데 있었을 때, 나는 홍이를 베니라고 불렀다. 예전의 다정했던 호칭으로 두 사람 사이는 더욱 긴장되고 말았다. 홍이는 나를 힐끗 보고는 서먹서먹한 분위기로 되돌린 다음 서둘러 은하 저편으로 얼굴을 돌렸다.

“베니, 만약 네가 오해를 하고 있다면, 난 그 오해를 풀고 싶다.”

홍이의 표정이 풀리고 입가가 흔들렸지만, 그녀는 마음의 줄을 다시 조이고는 갑자기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기어를 드라이브로 옮겼다. 차체가 흔들리더니 길가에 세워두었던 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말이 두절된 채 우리를 태운 우주선은 다시 서울을 향해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홍이를 한국식 발음이 아닌 베니라는 일본어로 불렀다. 홍이는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더니 내 우발적인 착상에 매우 기뻐했다. 그녀 안에서 기묘한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알았다. 베니…, 하고 몇 번이고 불러보더니 그 울림을 재미있어 했다. 뭔가 생각이 난 듯한 표정으로 즐거워하기에 나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홍이란 이름은 남자아이가 태어나길 바란 아버지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준비해 놓은 거였어.

나는 수긍하며 함께 미소를 지었다.

―일본에선 완전한 여자아이 이름인데. 홍이란 홍화(紅花, 잇꽃)에서 채취한 빨간색 색소를 말해. 불어의 루즈에 가까울까.

베니, 베니, 베니. 홍이는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한국에서는 중성적인 느낌이랄까? 어쩜 오히려 남성적인 느낌일지도 모르겠어.

핸들을 잡고 있는 최홍의 얼굴에는 그때의 부드러운 빛이 없다. 달 표면처럼 창백하게 얼어붙을 것 같이 빛났다. 그 조각 같은 옆모습에 터질 것 같던 미소를 가진 예전의 베니를 떠올린다.

―그럼, 넌 윤오.

―윤오?

―응, 준고를 한국어로 하면 윤오가 돼.

―어때, 멋진 이름이야?

―응, 좋아. 아주 좋아.

윤오, 윤오, 윤오. 홍이는 내 이름을 한국식으로 불러 보았다. 윤오, 홍이는 우리 둘만 있을 때는 나를 윤오라고 부를 때가 많았다. 쓸쓸해 보일 때, 어리광을 부릴 때 그렇게 불렀던 것 같기도 하다. 싸움을 하거나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는 준고 쪽이 많았다. 아니, 그녀는 일부러 양쪽을 섞어서 사용했었다. 두 이름을 별 생각 없이 무작위로 사용했다고 생각했으나, 되돌아보면 두 호칭 사이에는 그녀 마음의 동요 - 진실의 외침, 마음 깊은 곳의 상처가 숨겨져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홍이는 외국인인 나를 믿으려고 노력했던 건 아닐까. 혹은 조국을 떠나 외국에서 생활하는 외로움을 두 가지 이름을 섞어 부르면서 달래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베니,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하지만 지금은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분명 네게는 닿지 않겠지. 이 우연한 재회가 마지막 찬스란 것만은 알아. 그래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어.”

차는 남산을 내려와 신라호텔 쪽으로 향했다. 시내에 가까워질수록 헤어질 시간도 다가오고 있다. 차가 호텔 입구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그녀 마음에 닻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갑갑할 정도로 내 입은 무겁고, 홍이의 태도는 차가웠다.

나는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마음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조바심 탓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한심한 생각에 온몸에 쓸데없는 힘이 들어간다.

내 생각일까, 차가 속력을 내자 그녀가 뭔가를 뿌리치려 한다는 것이 전해 온다. 물론 그건 나란 환영임에 틀림없다. 두 사람이 빛을 발했던 때, 이제 와서는 무겁기만 한 그 눈부심과 혹은 사랑의 망령.

차가 호텔 입구에 다다르자 나는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는 걸 알았다. 차가 멈추고 달려온 벨보이가 조수석 문을 열자, 영하 10도의 차가운 공기가 내 뺨을 때렸다.

안녕히 가세요 하고 홍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녕히 가세요 하고 답했다.

얼어붙을 것 같은 추운 밤, 나는 호텔 입구에서 움직이질 못하고 사라져 가는 자동차를 바라보았다. 벨보이가 영어로 뭐라고 말을 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귀울음이 울리고 기억의 실이 머리 꼭대기에서 천상으로 팽팽히 잡아당겼다. 이노가시라 공원 숲 속을 혼자 힘겹게 달리던 흰옷의 홍이를 떠올렸다.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난 두 사람인데 우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가혹하게 높은 벽이 쳐 있다.

―베니, 넌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달리는 거니?

어느 날 나는 나무 뒤에 서서, 달리는 홍이의 등 뒤에 대고 물었다.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번져가는 시야 저편에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다.

번역 김훈아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