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하늘가까운바다 <28>
내가 몸을 담그고 있는 욕조의 물처럼 지희의 따뜻한 마음이 내게로 전해져 왔다
공지영
나는 더 뛰는 것을 포기하고 약간 절뚝이며 집을 향해 걸었다. 볕은 따뜻했지만 뺨으로 부딪히는 바람은 찼다. 집으로 돌아가니까 록이가 현관 앞에서 날 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보였다.
“왜 그래? 어디 다쳤어? 언니 얼굴이….”
이층 욕실로 올라가 거울을 보니까 얼굴에 땟국이 거뭇거뭇 말라붙어 있었다. 쓰고 있던 털모자를 벗으니까 약간 땀에 젖은 머리카락도 물풀을 바른 것처럼 엉겨붙어 있었다. 준고가 그 호숫가에서 더는 날 기다리지 않고 가버린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베니, 하고 불렀다 한들, 집에서 입다 뛰어나간 이 트레이닝복 차림에 이 머리꼴로 그를 만나 눈물을 보이기라도 했다면, 그래서 바로 이런 몰골로 그와 마주쳤다면, 하고 생각하자 차라리 조금 위안이 되었다. 준고가 베니라고 불렀던 그 여자는 윤이 나는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언제나 흰 옷을 깨끗이 입고, 하늘을 우러러 자신에게 부끄럽지 말자고 다짐했었다. 하늘을 향해서 뭐가 부끄럽고 뭐가 안 부끄러운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지만 그냥 윤동주의 그 시 구절이 멋있어서 그랬다. 나는 욕조에 물을 틀어놓고 털모자를 손에 쥔 채로 욕조 가에 걸터앉아 있었다. 욕실 한편에 붙은 커다란 유리로 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비추어졌다. 나는 거울을 향해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았다. 아자, 하고 구호까지 외쳐보려고 했지만 그러면 좀 우스울 것 같아 그건 포기하기로 했다.
욕조에 반신욕대를 설치해 놓고 노트북을 폈다. 이런 날에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추리소설을 읽거나 인터넷으로 제일 우스운 영화 한 편을 골라 보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었다. 아니면 의미도 없이 커서를 이리저리 옮기며 인터넷 유머를 뒤지던가 말이다.
욕조에 들어앉아 무선 인터넷으로 검색을 시작하려는데 딩동, 하는 소리가 들렸다.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편지함을 열어보니까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님에게 편지가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보였다. 지희였다.
너랑 전화 끊고 집 앞에 뭘 좀 사러 나가는데 우리 아파트 양지 뒤쪽에 노란 개나리가 몇 개 보였어. 이렇게 추운데도 노랗게 피어난 거야. 홍아, 때로 봄에도 눈 내리고, 한겨울 눈발 사이로 샛노란 개나리꽃이 저렇게 피어나기도 하잖아. 한여름 쨍쨍한 햇살에도 소나기가 퍼붓고, 서리 내리는 가을 한가운데에서도 단풍으로 물들지 못하고 그저 파랗게 얼어 있는 단풍나무가 몇 잎은 있는 것처럼, 이 거대한 유기체인 자연조차도 제 길을 못 찾아 헤매기도 하는데, 하물며 아주 작은 유기체인 인간인 네가 지금 길을 잃은 듯하다고 해서 너무 힘들어 하지 마. 가끔은 하늘도 마음을 못 잡고 비가 오다 개다 우박 뿌리다가 몸부림치기도 하는데 네 작은 심장이 속수무책으로 흔들린다 해도 괴로워하지 마.
그냥 시간에게 널 맡겨 봐. 그리고 너 자신을 들여다 봐. 약간은 구경하는 기분으로 말이야. 네 마음의 강에 물결이 잦아들고 그리고 고요해진 다음 어디로 흘러가고 싶어 하는지, 눈이 아프도록 들여다 봐. 그건 어쩌면 순응 같고 어쩌면 회피 같을지 모르지만 실은 우리가 삶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대응일지도 몰라. 적어도 시간은 우리에게 늘 정직한 친구이니까. 네 방에 불을 켜듯 네 마음에 불을 하나 켜고… 이제 너를 믿어 봐. 그리고 언제나 네 곁에 있는 이 든든한 친구도. 지희 내가 몸을 담그고 있는 욕조의 물처럼 지희의 따뜻한 마음이 내게로 전해져 왔다. 눈가로 다시 눈물이 번져 나왔다. 엄마는 가끔 드라마를 보며 훌쩍이다가 내가 늙었나, 하고 중얼거렸는데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눈물이 자꾸 나오는 것을 보니 서른도 안돼서 벌써 늙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가 없어서 이 세상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는데, 신이 나한테 조금 미안해서 지희 같이 좋은 친구를 주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하느님, 저한테 이런 좋은 친구를 주셔서 감사하긴 한데요, 곁들여 좋은 남자도 주시면 안돼요? 하고 중얼거렸다. 어떤 남자냐 면은요, 눈매가 서늘하고 시선은 따뜻하고 마음이 넓고 가슴은 튼튼한 그런 남자. 처음 보는 순간 내 시선을 얼어붙게 하는 그런… 하려다가 나는 기도를 멈추었다. 처음 우리가 사랑할 때 준고 같은, 이라고 말할 뻔했던 것이다.
수백 미터 저쪽에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그림자는 홍이, 분명 그녀였다 쓰지 히토나리 몸이 얼었다. 한 곳에 가만히 서 있기가 힘들어 제자리걸음을 해가며 추위를 견뎌보려 하지만, 곱은 손가락은 점점 감각을 잃어간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불 때마다 목을 움츠리고 바람이 지나가주기만을 기다린다. 벌써 1시간이 지났다. 언덕 위에 차가 서 있는지 확인하고, 다시 손목시계로 시선을 떨군다. 짧은 바늘이 정오를 가리키고 있다. 역시 어리석은 도박이었을까. 호숫가를 둘러싸고 있는 산책로 저편을 바라보다, 갑자기 기억이 뒤흔들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알 수는 없지만, 뇌보다 반사신경이 먼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숨이 멎고 시선은 얼어붙었으며 소리도 사라졌다. 기억 속에 살아있던 한 점이 차차 사람의 형태로 부풀어 오르더니, 이윽고 달리기를 하는 홍이 모습으로 이어졌다. 나도 모르게 갈대밭에서 산책로로 뛰쳐나갔다. 수백 미터 저쪽에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그림자는 홍이, 분명 그녀였다. 달리는 모습이 예전 그대로다. 손발을 크게 뻗어, 땅을 힘차게 차는 홍이가 나를 향해 달려온다. 시선을 홍이에게 고정시킨 채 발을 떼지 못한다. 호숫가의 모든 빛이 홍이에게 모아진다. 홍이의 거친 호흡과 심장고동이 차례차례 뇌리에서 되살아나고 그녀가 차올리는 지면의 소리까지도 생생하게 울린다. 그날, 홍이는 붉어진 얼굴로 미안하다고 한 마디 사과하면 되잖아, 하고 항의했다. 그날, 홍이는 달릴 때는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되니까 좋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날, 홍이는 나를 올려다보며, 일본사람이 아니면 안 되나요? 하고 서툰 일본어로 물었다. 그날, 내가 받쳐 든 우산 속에서 홍이는 변하지 않는 사랑을 믿어? 하고 물었다. 그날, 그날, 그날… 모든 것이 한순간의 일이었다. 그 한순간의 연속 속에 모든 것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있다고 깨닫기도 전에, 한순간은 사라지고 만다. 순간은 영원이다. 영원이 순간인 것처럼. 백여 미터 앞에서 홍이가 나를 발견했다. 미간을 좁힌 채 내 눈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무수한 역사의 단편들을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방대한 역사의 퇴적들이, 그리고 역사의 순간들이 다가오고 있다. 순간의 연속들이 마치 도미노처럼 나를 향해 밀려온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그것들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나와 홍이가 지내온 이 7년의 시간. 한국과 일본의 수십 세기에 걸친 역사의 일부. 전쟁과 평화, 우호와 차별, 그 모든 것들이 나를 향해 넘어지듯 달려온다. 시간이 정지된 우주 공간의 무중력 상태에서 우리 둘은 마주하고 있다. 위도 아래도, 빛도 소리도 없으며, 거리도 높이도 없는 시공간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다가오려 하는지, 멀어지려 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우리들은 우주 공간에 떠있는 별의 파편이다. 원래는 하나였던 별의 파편. 중력에 끌려가며 다음 순간, 빅뱅의 예감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파편. 홍이는 나를, 나는 홍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그날… 그리고 다음 순간, 눈 깜빡할 사이에 홍이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와 함께 영원은 무참히도 지워지고 나는 다시 순간으로 돌아왔다. 홍이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나와 다른 궤도에서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같은 궤도를 돌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뒤를 돌아 볼 수가 없었다. 수백 년을 한 순간에 살아 낸 사람처럼 에너지를 소진한 나는 내내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다. 갈대가 조용히 흔들리고 있는 산책로 앞을 멍하니 바라보며. 멀어져 가는 그녀의 발 소리만이 내 귓가에 닿았지만 그것마저 조금씩 멀어져 갔다. 단숨에 역사를 거슬러 올라갔다.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발끝을 살피며 넋이 빠진 모습으로 비탈을 올라 택시에 탔다. 운전기사가 뭐라 말을 했지만, 한동안 모국어인 일본어조차도 알아듣지 못했다. “호텔로 가 주세요.” 간신히 한마디를 건넨다. 엔진소리가 울리자 진동이 느껴진다. 나와 홍이의 시선은 마치 펜싱 칼끝처럼 서로를 겨냥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쪽 칼끝이 부딪치는 순간, 그 강렬한 충격으로 칼이 꺾여 원래 상태로 돌아올 수 없게 돼 버렸다. 홍이가 내 곁을 지나친 순간, 나는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났음을 깨달았다. 7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에야 나는 겨우 사랑의 종말을 알게 된 것이다. “만나셨군요.” 운전기사가 말했다. 나는 한동안 그 말의 의미가 머릿속에서 그려지지 않아 곤혹스러웠다. 그리고 잠시 후 천천히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네, 만난 것 같습니다.” 홍이가 지나간 뒤의 산책로. 색 바랜 유화가 된 갈대밭이 내 머릿속에서 흔들린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그냥 시간에게 널 맡겨 봐. 그리고 너 자신을 들여다 봐. 약간은 구경하는 기분으로 말이야. 네 마음의 강에 물결이 잦아들고 그리고 고요해진 다음 어디로 흘러가고 싶어 하는지, 눈이 아프도록 들여다 봐. 그건 어쩌면 순응 같고 어쩌면 회피 같을지 모르지만 실은 우리가 삶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대응일지도 몰라. 적어도 시간은 우리에게 늘 정직한 친구이니까. 네 방에 불을 켜듯 네 마음에 불을 하나 켜고… 이제 너를 믿어 봐. 그리고 언제나 네 곁에 있는 이 든든한 친구도. 지희 내가 몸을 담그고 있는 욕조의 물처럼 지희의 따뜻한 마음이 내게로 전해져 왔다. 눈가로 다시 눈물이 번져 나왔다. 엄마는 가끔 드라마를 보며 훌쩍이다가 내가 늙었나, 하고 중얼거렸는데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눈물이 자꾸 나오는 것을 보니 서른도 안돼서 벌써 늙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가 없어서 이 세상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는데, 신이 나한테 조금 미안해서 지희 같이 좋은 친구를 주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하느님, 저한테 이런 좋은 친구를 주셔서 감사하긴 한데요, 곁들여 좋은 남자도 주시면 안돼요? 하고 중얼거렸다. 어떤 남자냐 면은요, 눈매가 서늘하고 시선은 따뜻하고 마음이 넓고 가슴은 튼튼한 그런 남자. 처음 보는 순간 내 시선을 얼어붙게 하는 그런… 하려다가 나는 기도를 멈추었다. 처음 우리가 사랑할 때 준고 같은, 이라고 말할 뻔했던 것이다.
수백 미터 저쪽에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그림자는 홍이, 분명 그녀였다 쓰지 히토나리 몸이 얼었다. 한 곳에 가만히 서 있기가 힘들어 제자리걸음을 해가며 추위를 견뎌보려 하지만, 곱은 손가락은 점점 감각을 잃어간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불 때마다 목을 움츠리고 바람이 지나가주기만을 기다린다. 벌써 1시간이 지났다. 언덕 위에 차가 서 있는지 확인하고, 다시 손목시계로 시선을 떨군다. 짧은 바늘이 정오를 가리키고 있다. 역시 어리석은 도박이었을까. 호숫가를 둘러싸고 있는 산책로 저편을 바라보다, 갑자기 기억이 뒤흔들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알 수는 없지만, 뇌보다 반사신경이 먼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숨이 멎고 시선은 얼어붙었으며 소리도 사라졌다. 기억 속에 살아있던 한 점이 차차 사람의 형태로 부풀어 오르더니, 이윽고 달리기를 하는 홍이 모습으로 이어졌다. 나도 모르게 갈대밭에서 산책로로 뛰쳐나갔다. 수백 미터 저쪽에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그림자는 홍이, 분명 그녀였다. 달리는 모습이 예전 그대로다. 손발을 크게 뻗어, 땅을 힘차게 차는 홍이가 나를 향해 달려온다. 시선을 홍이에게 고정시킨 채 발을 떼지 못한다. 호숫가의 모든 빛이 홍이에게 모아진다. 홍이의 거친 호흡과 심장고동이 차례차례 뇌리에서 되살아나고 그녀가 차올리는 지면의 소리까지도 생생하게 울린다. 그날, 홍이는 붉어진 얼굴로 미안하다고 한 마디 사과하면 되잖아, 하고 항의했다. 그날, 홍이는 달릴 때는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되니까 좋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날, 홍이는 나를 올려다보며, 일본사람이 아니면 안 되나요? 하고 서툰 일본어로 물었다. 그날, 내가 받쳐 든 우산 속에서 홍이는 변하지 않는 사랑을 믿어? 하고 물었다. 그날, 그날, 그날… 모든 것이 한순간의 일이었다. 그 한순간의 연속 속에 모든 것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있다고 깨닫기도 전에, 한순간은 사라지고 만다. 순간은 영원이다. 영원이 순간인 것처럼. 백여 미터 앞에서 홍이가 나를 발견했다. 미간을 좁힌 채 내 눈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무수한 역사의 단편들을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방대한 역사의 퇴적들이, 그리고 역사의 순간들이 다가오고 있다. 순간의 연속들이 마치 도미노처럼 나를 향해 밀려온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그것들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나와 홍이가 지내온 이 7년의 시간. 한국과 일본의 수십 세기에 걸친 역사의 일부. 전쟁과 평화, 우호와 차별, 그 모든 것들이 나를 향해 넘어지듯 달려온다. 시간이 정지된 우주 공간의 무중력 상태에서 우리 둘은 마주하고 있다. 위도 아래도, 빛도 소리도 없으며, 거리도 높이도 없는 시공간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다가오려 하는지, 멀어지려 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우리들은 우주 공간에 떠있는 별의 파편이다. 원래는 하나였던 별의 파편. 중력에 끌려가며 다음 순간, 빅뱅의 예감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파편. 홍이는 나를, 나는 홍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그날… 그리고 다음 순간, 눈 깜빡할 사이에 홍이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와 함께 영원은 무참히도 지워지고 나는 다시 순간으로 돌아왔다. 홍이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나와 다른 궤도에서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같은 궤도를 돌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뒤를 돌아 볼 수가 없었다. 수백 년을 한 순간에 살아 낸 사람처럼 에너지를 소진한 나는 내내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다. 갈대가 조용히 흔들리고 있는 산책로 앞을 멍하니 바라보며. 멀어져 가는 그녀의 발 소리만이 내 귓가에 닿았지만 그것마저 조금씩 멀어져 갔다. 단숨에 역사를 거슬러 올라갔다.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발끝을 살피며 넋이 빠진 모습으로 비탈을 올라 택시에 탔다. 운전기사가 뭐라 말을 했지만, 한동안 모국어인 일본어조차도 알아듣지 못했다. “호텔로 가 주세요.” 간신히 한마디를 건넨다. 엔진소리가 울리자 진동이 느껴진다. 나와 홍이의 시선은 마치 펜싱 칼끝처럼 서로를 겨냥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쪽 칼끝이 부딪치는 순간, 그 강렬한 충격으로 칼이 꺾여 원래 상태로 돌아올 수 없게 돼 버렸다. 홍이가 내 곁을 지나친 순간, 나는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났음을 깨달았다. 7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에야 나는 겨우 사랑의 종말을 알게 된 것이다. “만나셨군요.” 운전기사가 말했다. 나는 한동안 그 말의 의미가 머릿속에서 그려지지 않아 곤혹스러웠다. 그리고 잠시 후 천천히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네, 만난 것 같습니다.” 홍이가 지나간 뒤의 산책로. 색 바랜 유화가 된 갈대밭이 내 머릿속에서 흔들린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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