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 ㄱ씨는 주당 40시간씩 일한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1년 동안 주당 45시간 일하며 저축해 둔 시간을 꺼내 어린이집 하원 시간에 맞춰 2시간 먼저 퇴근하기 위해 쓴다.
업무 스트레스로 이른바 ‘직장인 번아웃 증후군’을 겪고 있는 ㄴ씨는 장기 휴가인 안식년을 활용해 1년 동안 쉬면서 필요한 교육을 받을 계획이다. ㄷ씨는 연장 근로, 휴일 근로를 통해 모아둔 근로시간을 활용해 3년 빨리 은퇴해 외국에 살고 있는 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근로시간계좌제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는 독일 현지 사례를 한국경제연구원이 수집해 재구성한 내용이다. 근로시간계좌제는 한경연이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에게 맡겨 연구 중인 ‘노동관계 법제도 선진화를 위한 정책 과제’에 포함된 주요 제안의 하나다. 업무량이 많을 때 초과근무를 하면 이를 저축해뒀다가 일이 적을 때 휴가 등으로 소진하는 방식이다. 권 교수는 지난달 중간본 형태로 보고서를 제출한 상태이며 올해 말까지 완성본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한경연이 전했다.
권 교수는 중간 보고서에서 “독일의 경우 근로시간계좌제에 관한 단체협약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며 “근로시간 생애주기를 염두에 두고 근로자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질병 치료, 교육이나 훈련을 위한 장기간 휴식 시간 확보 등으로 자율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근로시간계좌제는 노사가 상생할 수 있는 모델로 적합하다”고 밝혔다.
한경연에 따르면 독일의 경우 단체협약을 통해 근로시간계좌제를 채택하면 근로자는 근로시간을 필요에 따라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유형은 다양해 정산 기간이 월 또는 년 단위로 설정된 단기근로시간계좌제 뿐 아니라 단위 기간 1년 이상의 장기근로시간계좌도 있다. 장기근로시간계좌에 쌓인 시간은 육아, 양육, 재교육, 안식년 및 유급조기퇴직 등을 위해 쓸 수 있다. 대개 시간계좌로 설정되지만 금전계좌(임금청구권 형태로 환산)로도 운영 가능하다고 한다. 독일에서 250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 장기 근로시간계좌를 활용하고 있는 비중이 2016년 기준 81%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돼 있다.
국내에서 근로시간계좌제를 도입하려면 법을 바꿔야 한다. 법으로 주당 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제한하고 초과근무에는 수당을 주게 돼 있어 노사가 합의하더라도 근로시간계좌제는 실시할 수 없다. 독일은 지난 2008년 8월 ‘유연한 근로시간 규정의 보장을 위한 구조개선법’을 제정하면서 근로시간계좌제도를 도입했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이정희 노사관계연구본부장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근로시간계좌)제도의 취지는 좋으나 (도입·시행에) 앞서 논의해야 할 것들이 좀 있다”고 말했다. 이 본부장은 “우리는 사업장에서 노동시간을 둘러싼 노사 간 논의가 ‘시간=임금’이란 측면에서만 이뤄진 역사가 길어 노동자 건강과 전반적인 삶에 미치는 영향, 이런 것에 대한 논의를 충분히 해오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노동자의 ‘시간 주권’을 높이는 제도의 취지를 구현할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다는 설명이다. 초과 근로에 대한 임금 보상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사례들이 불거지는 현실은 이와 맞닿아 있는 문제다.
더 본질적으로는 노동시간의 길이 자체가 너무 길다는 문제가 꼽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보면 2020년 기준 한국인의 연간 근로시간은 평균 1908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평균(1687시간)보다 221시간(9.2일), 독일(1332시간)에 견줘선 576시간(24일) 길다. 이정희 본부장은 “이런 상황에선 일단은 노동시간을 줄여내는 노력이 우선 필요하고, 그런 노력이 전제된 상황에서 노동자 대표를 통하든 노동자 개별적 동의를 거치든 시간 주권을 발현할 노사관계로 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경연은 권 교수로부터 최종 보고서를 제출받는 대로 추가적인 논의와 논리 개발을 거쳐 의제로 내세울 계획이다. 한경연은 “현재의 노동법은 근로시간에 관해 경직적으로 규정하고 있어 다양한 수요에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재택근무, 원격근무 등 근로 형태가 다양해지는데 따라 근로자도 자유롭게 출퇴근 시간을 결정하는 등 근로의 자율성 확대가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김영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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