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프랑스 게임산업전시회 파리게임주간(PGW)에 유비소프트의 롤러 챔피언스 경기가 열렸다. 유비소프트는 ‘대체 불가 토큰’(NFT)에 가장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대형 게임사다. REUTERS
게임산업은 역사가 그렇게 길지 않지만 현대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점점 커지고 있다. 5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게임산업은 이제 거의 모든 연령대가 즐기는 놀이로 성장했다. 게임은 디지털 환경과 컴퓨팅 기술에 특히 민감한 분야다. 기술과 환경의 변화를 늘 예의주시하며 촉각을 곤두세운다.
게임업계가 새 화두에 직면했다. ‘대체 불가 토큰’(NFT·Non-Fungible Token)이라는 비즈니스모델에 관한 이야기다. 2020년 말부터 세계 게임업계를 이끄는 주요 회사들이 잇달아 NFT 관련 사업 계획을 발표했다.
NFT 이슈가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다. 그동안 NFT 도입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업계는 새 기술의 긍정적 효과와 여전히 불확실한 기술의 미래로 인해 지금까지 적극적인 반응을 유보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게임회사들의 잇단 발표는 분명 게임업계가 서서히 NFT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신호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NFT는 말 그대로 디지털 아이템에 고유한 소유권을 부여하고 이를 추적할 수 있도록 설계된 블록체인 기술이다. 무한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자산에 고유성 또는 희소성을 블록체인으로 증명하기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게임업계가 주목하는 것은 이런 NFT의 속성이다.
국제축구연맹(FIFA) 시리즈를 비롯해 미국프로농구(NBA),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같은 인기 프로스포츠를 게임으로 만들어 40년 가까이 게임업계 맹주로 군림하는 일렉트로닉아츠(EA·Electronic Arts) 는 2020년 11월 3분기 실적 발표에서 블록체인 게임과 NFT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특히 앤드루 윌슨 EA 최고경영자는 ‘블록체인과 NFT 기반 게임은 게임산업의 미래’라는 표현을 쓰며 “새로운 기술이 우리 게임의 미래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하리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국외 언론은 EA의 최신 구인 공고에 블록체인 기술 관련 항목이 다수 포함된 점을 들어 EA가 머지않아 이 기술을 활용한 게임 서비스를 출시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EA는 “우리가 이 분야에 진입하기에는 아직 초기라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덧붙이며 NFT에 대한 조심스러움도 남겨뒀다.
유럽의 주요 게임사 유비소프트(UBI Soft)는 NFT에 가장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대형 게임사다. 유비소프트는 2020년 12월 자사 게임에서 디짓(Digits)이라는 NFT를 얻을 수 있는 새 플랫폼 ‘유비쿼츠’를 발표했다. 그 직후 자사 게임 <고스트 리콘 브레이크포인트> 사용자에게 시험용으로 무료 디짓을 제공했다.
디짓은 블록체인 기술이 결합된 NFT로 게임 안의 ‘꾸미기 아이템’이다. 유비소프트에 따르면 이 플랫폼을 도입하기 위해 4년간 블록체인 기술을 연구했다. 유비쿼츠는 NFT 기술 실용화를 위한 실험 단계다. 사용자가 게임에서 소비하는 시간을 유형의 가치로 전환해 게임 콘텐츠의 진정한 참여자가 되도록 유도하는 것이 목표다.
유비소프트의 이번 실험은 AAA게임(많은 예산이 들어간 블록버스터 게임을 이르는 업계 용어)에 NFT가 적용된 첫 사례다. NFT 기술이 적용된 작은 게임들이 출시된 적은 있다. 이에 따라 블록체인과 게임업계를 비롯해 NFT에 관심이 많은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들의 눈길이 집중됐다.
유비소프트의 과감한 행보에 게임 사용자의 반응은 신통찮다. 많은 사용자가 커뮤니티 사이트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삥뜯기’라고 비난했다. 이런 비난이 쇄도하자 유비소프트는 유비쿼츠에서 사용하는 NFT는 무료이며 실험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또 게임에 실질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단순한 꾸미기 아이템이라는 점을 내세워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애썼다.
EA와 유비소프트 등이 NFT 도입에 조심스러워하는 것은 NFT가 게임 사용자에게 여전히 환영받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게임 사용자들의 반대 이유는 단순하다. NFT가 게임 이용 비용을 늘릴지 모른다는 것이다. 과거 게임은 패키지를 사는 방식이었다. 한 번 비용을 치르면 언제든지 즐길 수 있었다. 아무리 비싼 게임이라도 몇십만원을 넘지 않았다.
지금은 입장만 무료일 뿐 게임을 쾌적하게 즐기려면 인앱결제(앱 안에서 결제)로 게임의 재화를 사야 한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게임 경험을 제대로 하려고 몇십만~몇백만원을 내기도 한다. 인앱결제가 유일한 수익모델인 게임사는 수익 극대화를 위해 다양한 장치를 마련한다. 많은 논란을 부른 ‘확률형 아이템’이 대표적이다. 많은 게이머는 NFT가 애초 취지와 달리 인앱결제처럼 게임 이용료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한다.
NFT 도입에 반대하는 많은 사용자는 또 게임이 상거래를 위한 플랫폼이 되는 것, 다시 말해 게임을 더 이상 게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리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용자들의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 아시아 시장에서 큰 인기몰이를 한 게임 <엑시 인피니티>다.
블록체인 기반의 이 게임은 게이머가 ‘엑시즈’라는 생물을 수집하고 번식시키는 게임이다. 일활성이용자(DAU)가 200만 명에 이른다. 사용자는 게임 내 자산을 NFT로 교환하거나 판매할 수 있고, 14일마다 토큰 현금화가 가능하다. ‘스카이마비스’라는 베트남 업체가 개발한 이 게임은 동남아에서 사회현상이 될 정도로 인기를 끈다.
특히 필리핀에서 많은 사람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이 게임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게임의 사용자와 유입자금이 늘자 2020년 8월 필리핀 재무부는 이 게임에서 발생하는 소득이 과세 대상이며, 토큰을 암호화폐로 규정한다고 발표했다.
동남아시아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은 베트남 게임사의 블록체인 기반 게임 <엑시 인피니티> 사용자는 게임 내 자산을 NFT로 교환·판매할 수 있고, 14일마다 현금화가 가능하다. 게임 사이트에선 캐릭터 가격과 거래 현황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엑시 인피니티 누리집
이 게임도 처음 의도와 달리 돈을 벌기 위한 상거래 플랫폼에 가까워졌다. ‘폭탄 돌리기’ 같은 폰지사기(다단계 금융사기)를 연상시키는 게임 방식에 많은 논란과 비난이 제기됐다. 이런 가운데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면서 게임 내 디지털 재화의 가치도 점점 하락하는 등 게임 서비스 자체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엑시 인피니티>의 과거와 현재만 봐도 ‘돈을 벌기 위한 게임’에는 분명히 현실적인 한계가 있어 보인다.
많은 전문가는 NFT가 언젠가 게임업계의 표준 기술로 자리잡을 것으로 전망하면서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지적한 다. 몇몇 게임 사례에서 나타났 듯이 NFT가 게임을 도박장처럼 만들 가능성이 크다 . 돈이 많은 사람이 결국 게임에서 승리한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게임을 ‘즐기는 콘텐츠’가 아닌 또 다른 디지털 노동으 로 인식할 것이라는 지적 이다.
실제로 현재 많은 온라인게임에 아이템을 대규모로 생산하는 ‘작업장’이라는 형태의 ‘디지털 노동’이 존재한다. 제3세계나 후진국에서는 이 시스템을 이용한 노동착취가 발생할 가능성도 크다. ‘우리는 그냥 게임을 하고 싶을 뿐, 주식이나 선물 거래처럼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은 NFT를 반대하는 게임 사용자들의 견해를 그대로 대변한다.
NFT 모델을 게임업계에서는 P2E(Play to Earn)라고 한다. P2E는 사용자가 투자하는 시간적 가치를 재화로 환전한다는 개념에서 분명히 메타버스 같은 가상현실에 가장 어울리는 경제시스템이 될 수 있다. 돈이 걸린 것이 으레 그렇듯 P2E가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문제다.
NFT에 미래가치와 활용성이 있지만 고려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다. 게임업체들이 눈치게임만 벌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엑시 인피니티>같이 실물경제에 영향을 끼치면 금융 당국과 마찰을 빚을 수 있고, 돈세탁 같은 범죄에 악용될 소지도 있다.
그러나 NFT를 통해 사용자들이 만드는 디지털 재화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것이 게임 플레이를 더욱 풍성하게 하고 콘텐츠 사용 경험을 높이는 것에 국한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규제보다 적절한 사용자 보호가 필요한 대목이다.
한국에서도 NFT 규제는 업계의 주요 이슈다. 위메이드가 게임 기반 NFT 거래시장을 열었고, 엔씨소프트도 NFT 기반 게임의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대형 게임사를 중심으로 NFT 진출이 잇따르고 있다. 디지털 재화에 환금성을 부여하는 행위를 규제한 게임산업진흥법 등의 법률 규제를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2020년 11월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암호화폐를 게임의 보상으로 제공하려던 모바일게임사가 규제에 막혀 해당 기능을 삭제한 뒤 게임을 출시한 일이 있었다. NFT가 게임산업의 표준이 될 것이므로 이런 규제가 게임시장에서 한국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비판이 많았다. 하지만 코인 열풍을 틈탄 사기 우려도 큰 만큼 전면적 규제 철폐는 위험하다. 한국 게임업계도 이런 부분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당장의 이익보다 산업 전체의 미래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전체 콘텐츠산업 가운데 새 기술인 NFT에 관한 실험을 하기에 적합한 분야가 게임이다. 각자 다른 디지털 경험을 가진 다양한 연령층이 있고, 디지털 재화가 생성·거래되기에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다. 현재 가장 뜨거운 정보기술(IT) 이슈인 메타버스·블록체인·NFT 등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2022년 게임산업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변화 움직임이 있다면 바로 여기서 시작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문동열 콘텐츠산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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