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개최한 국회 민생경제안정특별위원회. 공동취재사진
“고삐의 역할은 말을 꼼짝 못 하게 하는 게 아니라 주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김태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는 18일 서울시 중구 청계천로 예금보험공사에서 열린 재정 준칙 컨퍼런스에서 이같이 말했다. 재정 준칙은 정부의 재정 적자와 국가 채무 상한선 등을 정해놓고 그 선을 넘지 않도록 재정 운용을 관리하는 체계다. 윤석열 정부는 앞서 지난달 재정전략회의에서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 상한을 오는 2027년까지 50% 중반으로 관리하고, 연간 관리재정수지(국민연금 등 사회 보장성 기금을 제외한 순수 재정 수지) 적자 한도를 3%로 제한하겠다는 재정 준칙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국내 대표 재정 전문가인 김 교수는 “바람직한 재정 준칙은 필요한 재정 수단의 활용을 제한하는 게 아니라 안정적인 활용을 지원하는 것”이라며 “취지를 살리는 준칙 설정과 집행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재정 준칙이 정부 지출을 무조건 억제하기보다 경제 침체 때 확장 재정을 통해 경기에 대응하거나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투자를 할 수 있는 유연성을 지녀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주요국들의 재정 준칙에서 나타난 공통점이다. 재정 준칙에 예외 조항을 넣어 재정 운용의 유연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위기 뒤 지출 축소를 위한 강제력을 높였다.
다만 김 교수는 “정부는 불경기에 돈 풀기는 잘해도 경기가 좋을 때 비축은 못한다”면서 “재정 준칙 이행을 모니터링 및 평가하고 한도 초과 시 교정 방안을 제시하는 독립적인 재정 기구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옥동석 인천대 무역학부 교수도 “재정 준칙 준수 여부를 매년 점검·평가하고 정치인들의 재정 오·남용을 견제할 수 있는 9명 이내의 정치 중립적 재정위원회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회 예산정책처장을 지낸 김춘순 순천향대 미래융합대학원장은 “재정 준칙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학자(알렌 쉬크)도 글로벌 경제 위기 또는 코로나19 팬데믹 같은 비상사태에서는 재정 준칙의 일반적 적용은 맞지 않는다고 고백한 바 있다”면서 “실제로 유럽연합(EU) 등 다수 국가들이 감염병 팬데믹 등 국가 비상사태 때 재정 준칙을 예외적으로 운용한 사례가 많으므로 준칙 제도 입안 때 명확한 기준 마련이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재정 준칙의 기준을 바꿔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의 중장기 재정 경로를 볼 때 적정 부채 규모를 일률적으로 정하는 건 경제학적으로 근거가 명확하지 않아 합리적이지 않고 논란만 부를 수 있다”며 “국가채무 비율에 단순 상한선을 정하는 방식을 피하고 대신 재정 지출 증가율을 명목 성장률 수준으로 통제하는 지출 준칙 활용을 검토할 만하다”고 주장했다. 또 김 교수는 “재정 준칙의 예외 규정은 구체적이어야 하고 가능한 사전에 실질 성장률이나 실업률 같은 수치로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현 시점에서 재정 준칙 도입이 경기 둔화를 부채질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조영무 엘지(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재정 준칙을 정비하고 재정 건전성을 강화하는 건 맞는 방향성이지만 현재의 거시 경제 상황이 매우 불리한 상황이라는 점이 우려되는 부분”이라며 “올해와 내년에 우리나라 성장률을 높일 만한 뚜렷한 부문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정부 재정 지출마저 위축될 경우 성장률이 상당 폭 낮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박노욱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재정 준칙의 예외 조항 발동은 추가경정예산과 비슷한 성격이 있는 만큼 지금처럼 행정부가 일차적인 의사 결정을 하되 최종 승인은 국회에서 이뤄지게 해야 한다”는 견해를 내놨다.
박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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