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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금융위기 때,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이를 예측하지 못했다. 복잡한 수학모델에 근거했을 때, 화폐가 경제·금융 현상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칠 정도로 독립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세계적 화폐 연구 권위자인 제프리 잉햄은 화폐를 중립적 존재로 간주하는 이 시대착오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를 주장한다. 화폐의 본질을 무엇으로 보느냐가 인플레이션을 비롯해 반복되는 금융위기의 원인을 파악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머니>는 고대 그리스부터 화폐의 본질을 둘러싼 두 이론(상품화폐이론 대 신용화폐이론)이 거쳐온 유구한 논쟁의 역사로 세계 경제사를 재정립하면서 화폐에 숨겨진 의미와 힘을 발견하게 한다.
주류 경제학은 화폐를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상품화폐이론을 대변해왔다. 화폐는 그저 물물교환 수단으로서 거래를 원활하게 하는 기술적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반면 저자는 화폐를 신용이라고 보는 신용화폐이론의 편에 선다. 화폐가 사람들 사이의 거래에서 발생하는 ‘신용’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서 화폐는 더 독립적이고 능동적으로 변모한다. 인플레이션 같은 경제 현상에서도 이러한 화폐의 ‘사회적 본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인플레이션은 가격의 추가 상승이 기대될 때 가속되는데, 이는 가격 상승에 따른 구매력 손실을 막기 위해 사람들이 지출을 확대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 화폐의 실질가치가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표면적으로 물가 상승을 의미하지만 ‘너무 많은 화폐가 너무 적은 재화를 좇는 상태’라고 풀어서 이야기할 수도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금본위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되면서 케인스를 비롯한 신용화폐이론 지지자들은 국가가 “총수요를 생산 자극에 필요한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스스로 지출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통 화폐론자(상품화폐이론 지지자가 이에 해당한다)는 이러한 정부지출이 단기적으로 유효할지 몰라도 결국 장기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초기 신용화폐이론의 뒤를 이은 현대통화이론의 지지자는 정부가 선제적으로 지출을 확대함으로써 고용 증대와 경제 활성화를 이루고, 결국 더 많은 세금을 환수하면서 궁극적으로 인플레이션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다고 봤다.
화제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8화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이 세상 모든 건 정치적이다.” 최근 전세계가 겪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에서도 정치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코로나19 이후 급격하게 얼어붙은 세계경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축통화국인 미국을 비롯한 각국은 무제한 양적완화를 실시했다. 이렇게 유입된 화폐는 주가와 부동산 가격 폭등 등 자본시장과 자산가치에 거품을 일으키고 최악의 물가 폭등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물류난과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인플레이션이 가속됐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단행된 급격한 금리인상으로 양적완화에 따른 부작용이 세계 각국에 전가되는 이른바 ‘근린빈곤화 정책’이 거리낌 없이 행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제 화폐 공급의 급격한 증가, 더 정확히 말하면 정부지출의 급격한 증가가 인플레이션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완만한 인플레이션이 ‘하이퍼 인플레이션’(초인플레이션)으로 변하는 건 십중팔구 정당성이 결여된 정치적 포퓰리즘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화폐의 창출과 지출이 사회에 필요한 유효수요 수준을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화폐 공급 과정은 국가, 은행, 채무자 그리고 채권자 등 화폐가 어떻게, 얼마만큼 생산되는지에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경쟁적이고 상충하는 의견을 조정하면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화폐를 어떻게, 얼마만큼 생산할 것이냐는 경제·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결국 정치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박영서 이콘 편집자 bookoming@econb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