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걸리는 임원 5.5년만에 ‘휙’ 정태영·정용진시 등 4명은 임원 입사
현대가·신세계 빠르고 엘지 다소 더뎌
총수 9명 승진나이 비슷 관행도 ‘세습’
경영수업 너무 짧아 기업경쟁력 우려 재벌총수 일가들이 20대 후반에 처음 입사해서, 30대 초반에 임원이 되고, 30대 후반에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르는 한국 재벌의 초고속 경영권 승계 방식이 수십년 이어지며 관행화하고 있다. 이는 세계적 기업들이 오너나 전문경영인이라는 출신보다는 능력 위주로 최고경영자를 선택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전문가들은 충분한 경영 수업과 능력에 대한 객관적 검증 없이 총수 자녀라고 해서 자동으로 경영권을 대물림하는 방식은 해당 기업은 물론, 나라 경제를 위해서도 개선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 초고속 경영승계 실태=삼성, 엘지, 현대·기아차, 에스케이 등 경영승계가 진행 중이거나 최근에 끝난 국내 12개 그룹의 재벌총수 3~4세(한진·롯데는 2세) 36명의 경우 임원으로 임명된 나이는 평균 32.8살로, 삼성의 신규 임원 평균 나이인 46살에 견주어 13년 이상 이르다. 20대에 임원이 된 경우도 6명으로, 여섯에 한 명꼴이다.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의 조카인 정일선 비앤지스틸 사장과 둘째사위인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 이명희 신세계 회장의 자녀인 정용진 부사장과 정유경 조선호텔 상무,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의 아들인 이웅렬 회장,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의 장남인 정지선 부회장이 20대에 임원이 된 사례들이다. 재벌총수 3~4세들이 입사 뒤 임원이 되는 데 걸린 평균 기간인 5.5년은 대기업 일반 직원 같은 지위에 오르는 데 20년 정도 걸리는 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둘째사위인 김재열 제일모직 상무와 정일선 비앤지스틸 사장,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 등 4명은 처음부터 임원으로 입사했다. 재벌 3~4세 중에서 최고경영자 일을 하는 17명의 경우 처음 최고경영자에 선임된 나이가 평균 38.2살인 것도, 10대 그룹 소속 상장사 대표이사의 나이가 평균 57살인 것과 견주면 20년 정도 이르다. 이들이 입사 뒤 최고경영자가 될 때까지 걸린 기간은 10.8년이다. 차·부장으로 입사한 뒤 거의 1~2년에 한 직급씩 승진한다. 그룹별로 보면 현대·기아차와 현대백화점 등 범현대가와 신세계의 초고속 승진이 두드러진다. 반면, 엘지는 30대 후반~40대 초반에 임원으로 승진해 차이를 보였다. 삼성 이건희 회장과 엘지 구본무 회장, 현대·기아차 정몽구 회장, 한화 김승연 회장, 금호아시아나 박삼구 회장, 두산의 박용오·용성 회장, 효성의 조석래 회장 등 현직 재벌총수 8명의 최초 임원 및 최고경영자 선임 나이가 각각 30.2살과 37.5살로, 재벌 3~4세들과 큰 차이가 없는 점도 눈길을 끈다. 김진방 인하대 교수는 “재벌의 경영승계 방식이 한 세대가 흐르는 동안 거의 변화가 없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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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벌 경영승계 문제점=초고속 경영승계에 대한 기업 내 반응은 엇갈린다. 삼성 관계자는 “어차피 경영승계를 할 것이라면 임원이나 최고경영자가 조금 일찍 되든, 늦게 되든 큰 차이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현대차 임원도 “경영권을 이어받을 사람이 최고경영자를 일찍 맡는 게 책임경영 면에서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엘지 관계자는 “엘지는 비록 오너 일가라도 경영 훈련을 통해 능력을 검증받아야 경영자로 성장할 수 있는 전통이 있다”고 소개했다. 4대 그룹의 한 간부는 “총수일가의 경영승계를 화제삼는 것 자체가 회사 내 금기”라고 귀띔했다. 초고속 경영승계의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최고경영자까지 이르는 경영수업 기간이 너무 짧다는 점이다. 정광선 기업지배구조 개선지원센터 원장은 “세계적 기업은 아무리 유능해도 40대 이전에 최고경영자가 된 예를 찾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제너럴일렉트릭(GE)의 제프리 이멜트 회장은 2001년 잭 웰치에 이어 최고경영자가 될 때 45살이었다. 그가 회장이 되기까지는 19년의 세월이 필요했고, 4년 동안 다른 후보들과 최고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둘째는 경영능력에 대한 객관적 검증이 없다는 점이다. 김상조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은 “최고경영자의 선택이 이사회의 권한인 선진국과 달리, 우리는 모든 의사 결정권이 총수에게 집중돼 있는 1인 지배체제”라며, “총수 자녀가 처음부터 유일한 후계자로 인식되는 현실에서는 객관적인 능력 검증이 어렵다”고 말했다. 특히 최고경영자의 안목과 판단이 기업의 성패를 결정하는 글로벌 경쟁시대에서 능력에 대한 검증 없이 총수 자녀들에게 경영권을 자동 승계하는 관행은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외환위기 당시 국내 30대 재벌 중 부도로 쓰러진 16개 그룹 최고경영자의 상당수가 재벌 2세였다. 가족경영을 하는 세계적 기업들은 가족들의 경영 참여에 엄격한 원칙을 지킨다. 1970년대 중반까지 170여년 가족기업 체제를 유지하면서 세계 최대 화학회사로 성장한 듀폰의 경우 가문의 남자들은 입사 뒤 5~6년이 지나면 원로들에 의해 엄격한 평가를 받고, 10년 뒤 사장이 될 재목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경쟁에서 탈락한다. 세계적 경영학자인 피터 드러커는 “가족기업이라 하더라도 무능한 가족에게는 (최고경영자의) 일을 시켜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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