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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금융 소외를 넘자③] 일본, 은행·기업·지역이 하나

등록 2007-07-31 19:10수정 2007-07-31 19:18

지난 10일 일본 도쿄 북쪽 사이다마현에 있는 지방은행인 무사시노 은행에서 직원들이 고객들에게 대출 상담을 해주고 있다. 이 은행은 총 대출금의 90%를 이 지역에 배분하는 대표적인 ‘지역 밀착형 은행’인데, 일본에는 이런 지방은행이 64곳에 이른다.
지난 10일 일본 도쿄 북쪽 사이다마현에 있는 지방은행인 무사시노 은행에서 직원들이 고객들에게 대출 상담을 해주고 있다. 이 은행은 총 대출금의 90%를 이 지역에 배분하는 대표적인 ‘지역 밀착형 은행’인데, 일본에는 이런 지방은행이 64곳에 이른다.
‘지역 밀착형’ 금융 성과·…무담보·보증 대출 부쩍
기업대출 84% 중소기업용…유대관계 바탕 대출 결정
금융당국 ‘실행 프로그램’ 주효…은행들 변화 끌어내

“지방은행의 존재 의미는 지역과 공존하고 발전하기 위해서죠. 저희 은행은 지역 내 중소기업에 어떻게 하면 좀 더 편리하고 싼 이자로 대출을 해줄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합니다.”

지난 10일 일본 도쿄 북쪽 사이다마현에 있는 대형 지방은행 무사시노 은행에서 만난 시마오 히로시 종합기획부장은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총자산이 3조3108억엔(약 25조6900억원)인 이 은행은 ‘지역 밀착형’ 은행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대출금의 90%가 지역용으로 쓰이며, 기업대출 가운데 중소기업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84%에 이른다. 시마오 부장은 “5년 전부터 지역밀착형 영업을 추진한 결과, 지역에서 가장 사랑받는 은행이 됐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실제로 무사시노 은행은 지방은행 64곳 가운데 연간 잔고(대출금과 예금을 합한 금액) 증가율이 2위로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다.

우리에겐 ‘지역 밀착형 은행’이란 말 자체가 낯설게 느껴진다. 은행의 대형화·겸업화·글로벌화가 주요 화두로 제시되고 있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지역 밀착형 금융’ ‘관계형 금융’이란 말이 금융당국자는 물론 시중은행 관계자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관계형 금융이란 기업과의 오랜 거래관계를 통해 축적된 비공개 정보와 유대를 기반으로 대출 여부와 조건을 결정하는 것으로 주로 중소기업 금융에서 사용된다. 일본 금융가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일본 은행들이 처음부터 지역과 중소기업을 중시한 것은 아니다. 1998~99년 일본 은행들도 우리나라처럼 부실채권 문제가 불거지면서, 중소기업 대출을 대폭 축소하고 중소기업에 조기상환 요구를 마구 해댔다. 이로 인해 중소기업 경영자들이 자살을 하는 등 사회문제로까지 번졌고, 중소기업가들의 항의 목소리는 날로 높아져갔다. 심지어는 중소기업가들이 직접 나서 일본판 지역재투자법(CRA)인 ‘금융평가법’의 입법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중소기업 대출 기여도 등 ‘원활한 자금 수급’과 보증 관행 개선과 같은 ‘이용자 편의’라는 관점에서 금융기관을 평가해 그 결과를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하는 것이 이 법안의 핵심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금융 감독당국인 금융청은 ‘지역 금융’ ‘중소기업 금융’과 관련된 다양한 ‘액션(실행)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관계형 금융기능 강화 액션 프로그램’(2003~2004년)과 ‘지역밀착형 금융기능 강화 액션 프로그램’(2005~2006년)이 그것이다. 이 프로그램에는 담보나 보증 없이도 중소기업이나 영세 사업자들이 재무상태만 건전하면 대출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여러 모형들이 제시됐고, 은행들은 그 실적을 6개월마다 자사 홈페이지에 공개하도록 했다.

일본의 지역밀착 금융기능 강화 액션 프로그램 주요 내용
일본의 지역밀착 금융기능 강화 액션 프로그램 주요 내용
관료의 영향력이 큰 일본에서 금융당국의 액션 프로그램은 은행들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츠지 다케히코 금융청 과장보좌는 “담보나 보증이 있어야 대출을 해줬던 은행들의 기존 관행을 개선하는 데 가장 큰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재무상황을 모니터링하는 조건으로 대출해주는 융자(재무제한 조항을 활용한 융자)는 2003년에 2만1천건에 불과했지만, 2005년 5만4천건, 2006년 상반기엔 3만4천건으로 늘었다. 액수도 2003년 339억엔에서 2005년 2031억엔으로 7배가 늘었고, 2006년 상반기엔 1193억엔을 기록했다. 현금흐름 등 재무심사를 통해 점수를 매기고 담보 없이도 융자를 해주는 ‘스코어링(Scoring) 모델을 활용한 융자’ 건수도 2003년 13만6천건에서 2005년 25만건으로 늘었다.


금융청 액션 프로그램은 금융기관의 사고방식을 바꿨고, 대출상품도 다양해졌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고 볼 수 있다. 금융청은 올해부터는 액션 프로그램에 포함됐던 내용을 일상적인 ‘감독지침’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야마자키 요시히다 금융청 과장보좌는 “액션 프로그램은 6개월마다 실적을 발표해야 했는데, 은행들이 너무 발표 등에 연연해하는 단점이 있었다”며 “공개 횟수를 1년에 한 차례로 줄이고, 올해부터는 일상적인 지침으로 삼아 감독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도쿄/글·사진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중소기업 똘똘 뭉쳐 ‘대출 불공정’ 지적

‘금융평가법’ 제정운동 동참서 권리찾기 출발

일본 아이치현에 있는 하수도 물처리 회사인 에스템은 몇 년 전 만해도 대형은행이든 지방은행이든 돈을 빌리기 위해서는 무조건 부동산 담보를 제공해야 했다. 매출액이 36억엔(약 280억원) 가량인 이 회사는 해마다 실적이 증가하고 있지만, 은행들은 중소기업이라는 이유로 여전히 부동산 담보를 요구했다. 이 기업의 사장 스키가라 오사무 회장은 이런 은행들의 대출 관행에 불만이 많았다. 그러던 중 중소기업인들의 연구모임인 중소기업가동우회를 알게 됐다.

스키가라는 곧 ‘금융평가법’ 제정 운동에 동참했고, 거래 은행에 대출 관행의 불공정성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금융기관으로부터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금융기관 이용자로서 마땅히 찾아야 하는 권리라는 생각에 끊임없이 대화를 요구했다. 점차 이 회사는 은행과 협상할 수 있게 됐고, 지금은 부동산 담보없이도 대출이 가능하게 됐다.

구니요시 마사하루 중소기업가동우회 부회장은 “중소기업들이 금융기관에 담보를 맡기면 경영자의 불안감은 가중되며, 사업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때도 장애요인이 된다”며 “금융평가법 제정 운동을 펼친 뒤 많은 중소기업들이 보다 낮은 금리에 대출을 받거나 무담보 융자를 받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작은 목소리라도 대의에 맞는 것이라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며 “금융평가법 서명운동이 시민운동처럼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중소기업인들이 똘똘 뭉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일본의 중소기업 법인은 150만~160만개이고, 영세 자영업자까지 합치면 중소기업인은 450만~470만명에 이른다. 4만명의 회원을 두고 있는 중소기업가동우회는 중소기업 발전을 위한 작은 연구조직이지만 ‘금융평가법’ 제정 운동으로 중소기업 발전의 주춧돌이 됐다. 이 모임의 우리타 사마 정책국장은 “미국은 중소기업가나 영세 자영업자들이 실패를 하더라도 40%가 재도전할 수 있지만, 일본은 15%만이 가능하다”며 “기한이나 금액을 정하지 않는 포괄적 보증이나 담보를 요구하는 관행을 개선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양선아 기자


야마구치 릿교대 교수
야마구치 릿교대 교수
야마구치 릿교대 교수 인터뷰
“중소기업 헌장 채택운동 펼칠 것”

“‘금융평가법’ 제정 운동은 물론 ‘중소기업헌장’ 채택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금융평가법 제정 운동에 앞장을 서왔던 일본 릿교대학 야마구치 요시유키 교수(경제학·사진)는 또다른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금융평가법 제정 운동이 중소기업에 대한 원활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했다면, 이젠 국가의 이념이나 전략 측면에서 중소기업을 중시하도록 하는 ‘중소기업헌장’을 채택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야마구치 교수는 “유럽연합에서는 2000년에 중소기업헌장을 채택해 중소기업 정책을 경제정책의 핵심으로 하고 있다”며 “중소기업이 지역에서 이익을 거두고 지역경제는 중소기업 덕분에 살아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금융평가법 운동의 영향으로 금융청이 ‘액션 프로그램’을 실시한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중소기업이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릴 때 협상력을 높여주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금융 공공성은 아직도 미흡한 수준이라고 했다. 그는 “미국의 지역재투자법(CRA)처럼 지역기여도에 따라 은행들을 등급별로 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각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기여도와 보증 관행 개선 정도 등을 평가하고, 대출실적 건수나 액수가 아닌 등급별 표시를 함으로써 이용자들이 알기 쉽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평가법 입법화 시도는 그동안 세 차례나 있었지만 실패했다. 야마구치 교수와 중소기업가동우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 법안을 법제화하기 위해 서명운동을 계속 펼치고 있다. 이미 100만명에 이르는 중소기업인들이 서명을 했고, 1000개의 지방 의회에서 ‘금융평가법 법제화 추진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채택했다. 야마구치 교수는 “부실 은행의 정상화를 위해 투입된 공적자금을 생각하면 금융기관들은 자산 건전성뿐만 아니라 공공성 부문에서도 반드시 평가받아야 한다”며 “금융평가법 운동은 중소기업인들이 민주주의에 눈을 뜬 운동이며, 이러한 운동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개최된 금융 공공성 토론회에 초청돼 발제를 한 적도 있는 그는 “한국의 시민운동은 노조가 대부분 하고 있는데, 중소기업 경영자들도 이제는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많은 은행에 외자가 들어오면서 이윤 추구에만 혈안이 돼 있지 공공성은 도외시하고 있다”며 “은행 노조와 중소기업이 협력해 금융 공공성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양선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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