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4월 채권단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간 팬택의 경영성적은 이례적이다. 워크아웃 개시 5개월째부터 영업흑자를 기록하기 시작해 지난해 말까지 6분기 연속 흑자를 냈다. 지난해 매출 2조원, 휴대전화 판매대수는 1천만대를 돌파했다. 경쟁업체들은 물론 금융계에서도 ‘워크아웃 상태의 기업으로서는 놀라운 실적’이라고 평가한다. 박병엽 부회장은 임직원들에게“올해 위기만 잘 넘기면 우리가 30년, 50년 영속할 기반을 마련할 것이다”라고 북돋았다. 무엇이 이들을 재기할 수 있게 했을까.
아직 어둑어둑한 지난 2일 아침 7시, 팬택계열의 과장급 이상 임직원 400여명은 2009년 시무식을 위해 서울 상암동 본사 강당에 모여들었다. 지난 2007년부터 팬택 사람들은 ‘남들보다 한발 더 움직이는’ 데 익숙해졌다. 장시간 논의가 필요한 회의나 주요토론은 대부분 토요일로 미뤄 토요일에도 회사는 평일처럼 붐빈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빠른 시간에 뛰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박 부회장의 지론 때문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서다. 삼성전자와 엘지전자가 한해 100~200가지 휴대전화 모델을 내놓는데 비해, 팬택이 지난해 출시한 모델은 30여가지에 불과하다. 그만큼 모델 하나하나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팬택이 지난해 11월 내놓은 전면터치스크린폰 ‘프레스토’는 요즘 국내에서만 하루 평균 1500여대씩 팔려 ‘대박’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제품 개발자들은 아직도 날마다 입이 바싹 마른다.
‘좀 쉽게 살 수 없어?’ 프레스토 티브이 광고에서는 이렇게 말하지만, 프레스토의 탄생은 ‘참으로 어려운 과정’의 연속이었다.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전면 커버의 강화유리와 머리부분을 팝업 방식으로 밀어올리는 잠금장치다. 먼저 출시된 경쟁사의 터치폰들이 터치 뒤 잔상이 남거나 자주 옆의 잠금장치를 눌러 이를 해제시켜야 하는 문제점을 ‘영리하게’ 해결한 아이디어다.
하지만 디자인팀이 이 아이디어를 내놓았을 때 내부 반대는 격심했다. 이지홍 내수기획팀 과장은 “유리가 충격에 약하고 머리부분 잠금장치가 고정이 안돼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전했다. 철판에 던져보거나 긁어보기도 여러차례, 디자인팀은 실물모형을 몇개씩 더 만들어야 했다.
소프트웨어나 유아이(UI)도 만만치 않았다. 프레스토는 한번의 터치로 음악 플레이가 가능하다. 잠금이 작동된 상태에서도, 화면에 손가락으로 돌린다든지 잡아끄는 제스처를 하면 플레이나 정지·다음곡·이전곡·볼륨 등이 조절된다. 간단해보이지만 잠금 상태에서도 이전 기능이 유지되도록 하려면 소프트웨어가 기존 것과 완전히 달라져야 했다. 팬택의 다른 제품들보다 훨씬 긴 1년의 개발기간이 걸리 것도 이 때문이었다. “차별성 없이는 생존을 할 수 없다는 절박함”(국내디자인팀 장호영 전임연구원)이 있어 가능했다.
거기다 최근 1~2년 새 급속도로 바뀐 조직체계는 이들을 ‘일당백’으로 만들었다. 김정욱 소프트웨어개발실 책임연구원은 “이전엔 모델별로 소프트웨어 하나씩 맡았는데 이게 기능조직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개발자 한사람이 여러 모델을 동시에 맡으면서 효율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내수디자인팀의 인원 숫자는 밝히기를 민망해할 정도다. 하지만 그 결과 중도에 포기하는 모델이 확 줄었다. 생기는 문제를 바로 다음 모델엔 해결하며 적용시켜 나가니까 출시지연 사례도 없어졌다. 팬택을 다시 일으킨 경영전략, ‘비용은 고정하고 효율은 최대화시킨다’는 ‘픽스&맥스 전략’의 고갱이는 이런 것이다.
한때 휴대전화 업계에선 ‘선망의 직장’일 정도로 연봉이나 대우가 좋았던 팬택 사람들에게 최근 1~2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4500명에 이르던 구성원이 3천명으로 줄었다. 김정욱 연구원은 “워크아웃 이후 한번 해보자는 리더십과 해볼만하다는 내부 분위기가 없었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지…”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워크아웃에 들어간 뒤 박병엽 부회장은 매분기 경영설명회를 열어 투명하게 경영상태를 밝혔다. 일요일엔 출근한 직원 전체를 구내식당으로 불러 자장면을 함께 시켜먹기도 했다.
팬택은 글로벌 무대에서 노키아나 삼성, 엘지 같은 업체들과 경쟁하지만 이들과 무모하게 겨루지 않는다. 한 관계자는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경쟁업체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을 만큼은 아직 체력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프레스토에서 보듯 ‘남들보다 늦게 시작해도 한걸음 앞선 아이디어로 따라잡는다’는 ‘스마트 팔로워’전략을 채택했다.
순발력 있고 투명한 조직체계, 감성적이고 아이디어로 ‘편안하고 재미있고 느끼는’ 휴대전화를 만들겠다는 팬택의 전략은, 조금씩 싹을 틔워가고 있다.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