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
[열려라 경제] 이정우의 경제이야기
지난달 미국 의회는 8천억달러의 경기부양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철도·다리·댐 등 사회기반시설 확충을 위해 철강·아연 등 자재를 살 때는 미국 제품을 우선 사용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른바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이라는 국산품 애용 조항이다. 이 조처는 즉각 많은 나라의 의구심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바이 아메리칸’ 정책의 유래는 대공황기다. 1929년 대공황이 닥쳤을 때 미국의 후버 대통령은 속수무책이었고, 그나마 손을 댄 정책도 차라리 아니 함만 못한 유해한 내용이 많았다. 예컨대 1930년 ‘스무트-홀리 관세법안’이 통과되어 미국의 평균 관세율이 59%로 올랐는데, 이는 다른 나라의 희생 아래 경기를 회복하려는 전형적인 ‘근린궁핍화’ 정책이었다. 다른 나라들이 가만히 있으면 이 정책은 효과가 있겠지만 다른 나라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결과적으로 23개국의 관세 보복을 불러와서 세계 무역을 축소했을 뿐이다. 미국의 무역 규모도 거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스무트-홀리법안’에 대해서 1천명이 넘는 경제학자들이 반대 청원을 했지만 후버 대통령은 서명·발효시키고 말았다.
또다른 근린궁핍화 조처가 ‘바이 아메리칸’이었다. 미국의 언론 재벌 윌리엄 허스트는 1932년에 이르러 대공황 대책으로는 국산품 애용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자기 소유의 27개 일간지와 수십개 잡지를 총동원해서 ‘바이 아메리칸’ 추진에 나섰다. 원래 허스트는 악의적 선전으로 유명한 언론인이어서 ‘황색 저널리즘’이란 말이 바로 허스트 때문에 생겼다. 허스트는 27개 일간지에 매일 하나 이상의 ‘바이 아메리칸’ 관련 기사를 실었고, 매일 사설을 통해 ‘바이 아메리칸’ 홍보에 나섰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바이 아메리칸’ 법안은 1933년 초 상하 양원을 통과했고, 후버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날인 1933년 3월3일 이 법안에 서명하여 발효시켰다.
그러나 ‘바이 아메리칸’은 허스트의 창작품은 아니다. 1920년대 영국에서는 이미 ‘바이 브리티시’ 운동이 활발했다. 영국 정부는 ‘바이 브리티시’라는 포스터를 400만장이나 전국 버스에 붙였고, 런던의 트라팔가르 광장에는 ‘바이 브리티시’라는 5미터짜리 대형 선간판이 1300개 전구의 불빛으로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심지어 미국에서 영국에 수출했던 상품 중 미국에 반품되는 소포에는 ‘영국 제품이 최고’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영국의 국산품 애용 운동이 허스트를 자극하여 그로 하여금 격렬한 ‘바이 아메리칸’ 운동을 전개하게 한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미국이 이렇게 나오자, 프랑스와 독일도 각각 국산품 애용 운동에 나섰다.
모두 이렇게 행동하면 결과는 뻔하다. 각국의 수출이 감소했고, 모두 손해를 보았다. ‘애국심은 악당의 최후의 도피처’란 말도 있듯이 애국이라고 무조건 옳은 건 아니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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