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예금명의자=예금주’ 판결 파장
무력화된 금융실명제 취지 다시 살아나
비자금 조성·편법 투자 쉽지만은 않을듯
무력화된 금융실명제 취지 다시 살아나
비자금 조성·편법 투자 쉽지만은 않을듯
금융실명제에서 예금 명의자만이 실제로 예금주가 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은 앞으로 금융 거래 관행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금융실명제가 도입된 지 10여년이 훌쩍 지났지만, 기업이나 금융기관은 물론 개인들도 여러 가지 목적에서 차명계좌를 활용한 거래를 많이 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대법원 판결로 금융 거래가 좀더 투명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고 있다.
이번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법원은 금융거래 현실을 중시해, 금융회사 통장에 들어 있는 돈의 실제 주인을 예금주로 보는 해석을 내렸다. 그 결과 자금 노출을 피하고 싶은 금융 거래자는 차명이나 가명으로 통장을 개설하면서도 예금주 권리를 행사해 왔다.
정치인이나 기업인 관련 비리 수사에서 숨겨진 거액의 비자금이 심심찮게 등장한 것도 이런 법적 환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007년 말 삼성그룹 전 법무실장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시작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비자금 사건 당시 삼성 전·현직 임원 명의의 차명계좌 1199여개가 특별검사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 가장 쉬운 예다. 당시 시민단체나 법조계 일각에선 이 전 회장이 이런 대규모 차명 재산을 둘 수 있던 것은 실명거래를 원칙으로 하는 금융실명제법이 무력화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때까지 법원 판례는 실제 예금주와 이름을 빌려준 예금 명의자끼리 암묵적인 동의가 있을 경우엔 실제 예금자에게 예금주의 권리를 인정해 줬다.
이런 기존 판례를 뒤집은 이번 대법원 판결은 고소득층의 재테크 행태에도 큰 변화를 줄 것으로 예상된다. 일부 고소득층은 1인당 예금자 보호 한도(5천만원)와 비과세 한도(3천만원) 때문에 가족이나 친척, 혹은 친구 명의를 자주 활용해 왔다. 특히 지난해 9월 이후 금융위기가 본격화하면서 시중은행의 예금 금리가 연 5~6%에 머무르고, 저축은행의 예금 금리는 연 8%대일 때 고소득층은 이러한 방식의 투자를 많이 해 왔다. 한 저축은행 관계자는 “저축은행 위기설이 많이 돌던 지난해 말에도 강남 고소득자들은 5천만원씩 여러 사람 명의로 나눠 거액을 예치했다”며 “여러 저축은행에 분산 예치하는 것보다 더 간편하고 수월한 방식이어서 강남에선 유행하던 재테크 방식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은 올해 들어 신협 등 상호금융기관에서도 자주 나타났다. 신협 쪽은 1인당 3천만원까지는 이자 수익의 15.4%까지 물어야 하는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혜택이 있었기 때문에 저축은행권보다도 더 높은 금리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또 일부 고소득자들은 3천만원씩 나눠서 다른 사람 명의로 예치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 대법원 판결로 금융실명제법의 허점을 이용해 비자금을 조성하는 행위나, 고수익을 찾아 횡행하던 편법적인 투자도 일정 부분 제약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 판결에도 불구하고 실제 예금주와 명의를 빌려준 쪽이 예금 소유권을 놓고 법정 다툼을 벌이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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