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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한국선 노동유연성이 ‘최대과제’라는데…
세계은행은 정작 지표 ‘삭제령’

등록 2009-06-09 14:34수정 2009-06-09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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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시간 등 규제 있으면 경직성 점수 올라가는식
저개발국이 상위 오르기도…“실효성 없다” 판단
세계은행이 노동시장 유연화 수준을 가늠하는 대표 척도로 활용해온 ‘고용지표’(Employing Workers Indicator·EWI)를 국가별 정책수립 과정에서 인용하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린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국가별 순위에서 한국은 조사대상 181개국 중 152위에 그쳐, 노동시장 유연화가 시급한 나라라는 공격을 받아왔다.

8일 세계은행이 작성한 ‘고용지표(EWI) 개정’이라는 공식 문서를 보면, “국가별 정책 및 제도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설정할 때, 이 지표는 삭제해야 한다”며 “고용지표가 세계은행의 정책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할 것이며 각국에 대한 정책 권고의 근거로 활용되거나, 원조국에 대한 지원프로그램을 명시하는 문서 등에도 쓰여져선 안 된다”고 명시돼 있다. 이 문서는 세계은행의 각국 사무소에도 전달됐다.

세계은행 고용지표는 주로 개발도상국의 노동규제 완화 및 노동법 개정을 유도하는 핵심 근거였다. 국내에서도 정부가 노동시장 유연화 수준이 낮다는 주장을 펼 때마다 단골로 등장한 바 있다.

■ 실효성 없는 지표에 세계은행도 백기 세계은행 고용지표는 비정규직 고용과 근로시간, 해고 등에 관한 법제를 점수로 환산한다. 규제가 엄격할수록 경직성 점수가 높아지며, 고용 경쟁력과 노동시장 유연화 수준을 나타내는 국가 순위는 낮아진다. 하지만 노동시장 규제에 대한 법과 제도를 기계적으로 투입시켜 순위를 매긴다는 점에서 실효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먼저 국제노동기준에 나오는 최소한의 법적 규제가 고용지표에선 ‘경직된’ 노동시장을 조성하는 요인으로 둔갑했다. 예컨대 노동법에서 야간근로에 대한 규제를 두고 있다면, 경직성 점수가 올라간다. 한국처럼 법정 근로시간보다 실근로시간이 더 긴 나라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판정을 받을 수도 있다. 한국은 또 이미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가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섰지만, 기간제 고용에 대한 규제를 두고 있기 때문에 ‘경직성’ 점수가 올라간다.

종업원 200명 이상 기업에 해당되는 규제만 평가기준으로 삼는 것도 한계였다. 자영업자 및 중소기업 노동자 비중이 큰 개도국에선 극히 일부의 노동시장 상황만 반영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세계은행의 고용지표로 노동시장 유연성을 평가하면, 정상적 노동시장 제도를 아직 갖추지 못한 나라들이 더 후한 점수를 받는 역설적 결과가 나온다. 실제로 지난해 고용지표 상위 국가들 중에는 통가, 브루나이 등 저개발국들도 수두룩하다.

세계은행의 이번 조처는 실효성 없는 고용지표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에 스스로 ‘백기’를 든 것으로 보인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노동시장 유연성은 법률 조항에 점수를 매겨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가 변동할 때 노동시장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탄력적으로 조응하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고용지표 속의 한국은 노동규제가 엄격한 나라로 분류되지만, 이인재 인천대 교수가 2005년 60개국의 고용조정 속도를 추정한 연구 결과에선 한국의 고용조정 유연성이 9번째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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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위기 속 노동자 보호 살피는 새 지표 개발 세계은행이 전세계적 경제위기 속에서 균형 잡힌 지표 개발에 대한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세계은행은 “비즈니스 환경은 개발정책의 한 측면일 뿐이며, 다른 개발 목표들도 적절한 비중으로 다뤄져야 한다”며 “각국 정부 정책이 기업의 성장을 돕는 것뿐 아니라 노동자와 저소득층의 요구에도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문서에서 밝혔다.

세계은행은 또 노동자 보호 정책을 펴는 나라에 유리한 점수를 주도록 고용지표의 평가기준을 조정할 계획이며, 각국이 실업자를 포함한 노동자 보호정책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지 여부를 살피는 새 지표(Worker Protection Indicator) 개발에 대해서도 논의를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세계은행의 조처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둘러싼 국내의 해묵은 논쟁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주로 인용해온 대표적 노동시장 유연화 국가 순위가 무용지물이 된 탓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달 7일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노동유연성 문제는 연말까지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국정 최대 과제”라고 강조했다. 정부 일각에선 그 근거로 세계은행의 고용지표를 예로 들며, 고용 경쟁력이 전세계에서 ‘꼴찌 수준’(152위)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기도 했다.

국제노동기구(ILO)의 이상헌 선임 연구위원은 “많은 나라에서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해 막대한 사회·경제적 비용을 치르면서 내부 갈등을 빚어왔지만, 정작 노동시장 성과와의 상관관계를 입증한 실증 연구가 거의 없다”며 “요즘은 노동시장 유연화가 무조건 바람직하다고 믿는 나라들이 많이 줄었는데, 한국은 여전히 유연화 논리에 얽매여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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