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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쌉쌀한 매혹에 폭~ 문화 감별 애쓰죠”

등록 2005-05-23 19:05수정 2005-05-23 19:05


명장을 찾아서

경제 일선에서 묵묵히 외길을 걸어 경지에 오른 명장들을 소개한다. 디지털 시대의 그늘에 가린 생산현장을 들여다보고, 땀방울의 의미와 장인 정신을 되새겨본다.

김영준 오비맥주 양조기술연구소장

30년 세월을 간직한 솥들이 있다. 경기도 이천 오비맥주 공장에 들어앉은 직경 6m 안팎의 구리솥들이다. 양조기술연구소의 ‘브루마스터’ 김영준(51) 소장은 이 솥과 함께 27년 맥주인생을 빚어왔다. 이 솥들은 한 때 보리를 싹틔운 맥아(엿기름)와 홉열매를 품고 펄펄 끓었다. 발효 전 감주 특유의 구수한 냄새는 그에게 변치않는 ‘매혹’이다.


베를린공대서 브루마스트과정 마쳐 27년 맥주인생

‘브루마스터’는 독일에서 맥주 장인들을 일컫던 말로, 현재는 대학의 학위 명칭으로도 통한다. 김 소장은 30대에 접어든 1986년 베를린공대의 브루마스터 과정에 들어갔다. 오비맥주 현직 브루마스터 가운데 두번째로 이 학위를 따냈는데, 맥주의 본고장에서 ‘맥주명장’ 보증을 받은 셈이다. “옛날 독일에선 마을의 주요 지도자가 세사람이었다고 해요. 마을 행정수장인 시장, 의사노릇을 하던 약사, 그리고 또 한명이 ‘브루마스터’라고 불리던 맥주 양조장 주인이었지요. 독일의 맥주는 ‘액체 빵’이라고 불릴 만큼 필수 음료였으니까요.”

독일의 맥주 양조장은 1300여곳으로 유럽 전체 양조장 수의 77%에 달한다. 맥주종류도 다양해서 5천종을 훌쩍 넘는다. 그는 유학시절 크고 작은 양조장들을 숱하게 돌아봤다. 덕분에 맥주맛만 보면 그 회사 양조장 설비와 자동화 수준이 훤히 보인다. 전세계에서 몰려든 유학생들과 함께 패션감각 같은 맥주 트렌드를 익힌 것도 이곳에서다.

짙은 감주 향 탓인지 50대 맥주명장은 어느덧 스물넷의 청년 시절로 거슬러 올랐다. “학사장교 복무를 끝낸 뒤 열흘만에 오비맥주에 들어왔어요. 그때만 해도 맥주는 비싼 술이라, 맥주를 마음대로 마신다는 게 어찌나 좋던지….”

김 소장은 70년대 말과 80년대 전반을 ‘생산자 주도의 시대’로 기억했다. 1년만에 매출이 두배씩 껑충 뛰던 시절이었다. 맥주는 병에 담기 무섭게 팔려나갔고, 주말없이 일하고도 신이 났다. “82년에 알코올 없는 맥주를 처음 개발했어요. 당시 중동 건설붐에 사우디로 간 근로자들을 위해서였지요. 이슬람 국가라서 술은 금지돼 있었으니까요. 뜨거운 사막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고국에서 마시던 맥주 한잔이 얼마나 그리웠겠어요. 한때 불티나게 수출했지요.”

마음껏 마셨고 주말도 없이 일했죠
맥주맛 한세대 걸치며 절반 순해져

맥주는 솥에 끓여낸 감주 상태에서 효모가 첨가돼 한주간의 발효와 3~4주의 숙성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의 온도는 맥주 종류를 ‘라거’와 ‘에일’로 크게 갈라놓는데, 우리 맥주의 대부분은 저온 발효한 ‘라거’로 좀더 깨끗하면서 쌉쌀한 맛을 낸다. 갓 거른 맥주는 말간 황금빛으로 빛난다. 이런 신선한 맥주를 원없이 마실 수 있는 게 공장 근무자들의 자랑이다.

“맥주 품질을 그대로 보존하는 게 우리 일이지만, 일반인들은 못 느끼는 미세한 맛의 차이는 있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서울 가서 생맥주를 마시면 약간 쿰쿰하다고 느끼거든요.”

김 소장은 타사 맥주도 공장마다 약간 다른 맛의 차이를 감별해낸다고 했다. 혀와 코로 미세한 맛과 품질의 차이까지 짚어내는 관능검사 전문가는 회사 내 40여명 정도. 그와 비슷한 수준의 혀를 가진 사람들은 10명 안팎이다. 당연히 담배는 일찌감치 끊었고, 스킨·로션도 가장 향이 약한 제품만 사용한다.

“군대시절 포복훈련 땐 수십미터 앞 담배연기도 감지해냅니다. 전 이런 게 직업의식이라고 생각해요. 나이를 먹으면 혀가 무뎌질 듯도 한데, 필요 때문인지 오히려 더 예민해지는 느낌입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맥주맛도 많이 변했다. “제 입사 초기 맥주의 쓴 맛이 20 비유(BU·쓴맛을 재는 단위)였다면, 지금은 12 비유 정도 됩니다. 거의 절반 가까이 순해진 셈이지요. 요즘 젊은이들은 순한 맥주를 좋아해요.”

김 소장은 ‘대기업’의 브루마스터와 ‘마을 호프집’의 브루마스터는 같으면서도 다르다고 말했다. “독일엔 작은 마을에서 개성적인 맥주를 만드는 브루마스터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대기업 브루마스터는 좀더 넓은 시장을 염두에 둬야 해요. 예컨대 저는 맵고 짠 안주가 많은 한국 전반의 맥주문화를 고민합니다.” 그는 ‘산화된 맥주는 질 나쁜 것이다’라는 맥주계 상식도 홍콩시장에선 뒤집혔다고 설명했다. 기름진 요리를 먹는 사람들에겐 변질된 씁쓸한 맛이 오히려 환대받았던 것이다. 그는 ‘대기업 브루마스터’로서 중국 시장에 특히 관심이 많다.

김 소장은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고 했다. 그가 입사한 이래 90년대 초까지 오비맥주와 하이트맥주의 전신인 크라운맥주의 점유율 격차는 7대3 안팎이었다. 그러나 92년 점유율 30.8%에 불과하던 크라운맥주는 93년 ‘하이트맥주’로 브랜드를 바꿔 40년 열세를 뒤집었다. 지난해 순매출액 기준으로 오비맥주와 하이트맥주의 시장 비중은 4대6 정도다.

경쟁자가 있는 것은 좋은일
중국에 관심 많아요

“한때 연간 1억2천만 상자를 팔았는데 현재는 7800만 상자 정도 됩니다. 생산량이 줄면서 구리솥이 쉬게 된 것도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였지요.” 그는 “품질과 기술엔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경쟁자가 있다는 건 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이트가 뒤집었듯, 오비맥주한테도 기회는 있습니다. 지금은 스테인리스 스틸 솥만 쓰고 구리솥은 놀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저 솥도 다 끓일 겁니다.” 글 이천/정세라 기자 seraj@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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