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나눔 홀씨’는 멈추지 않는다
[사회책임경영]
“기업들 눈치보기가 심해요. 경영악화로 사회공헌 예산은 줄었는데,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그렇다고 경영여건이 빠른 속도로 개선될 전망은 안 보이니, 기업들이 좋은 일 한다고 적극적으로 앞에 나서기가 쉽지 않죠.” 한 대기업 사회공헌 팀장이 전하는 2009년 기업 사회공헌 활동 현장의 분위기다. 올해 기업 사회공헌의 가장 큰 특징은 경영환경 악화로 인해 다른 기업 살림살이와 함께 사회공헌 예산까지 위축된 것이다. 4대 그룹의 한 사회공헌 팀장은 “관련 예산을 10% 정도 줄여 짰는데, 사회적인 눈도 있고, 주던 지원을 갑자기 끊는 것도 힘들어 어려움이 많다”고 털어놓는다.
경제위기로 ‘사회공헌’ 예산 감소
효율성 높일 신규사업 찾기 집중 미취업 청년·주부에 봉사단 일자리
전문가가 ‘사회적기업’ 컨설팅 도움 ‘사회공헌이 블루오션’ 적극 사고도 기업 사회공헌 지출의 감소는 외환위기 이후 10여년 만의 일이다. 반면 경제난으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소외계층은 오히려 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요즘 기업 사회공헌 담당부서들은 줄어든 예산으로 늘어난 사회적 요구에 대응하는 묘수찾기에 분주하다. 한 금융사 사회공헌팀 책임자는 “사회공헌 사업의 구조조정을 통해 예산 집행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펴고 있다”고 전한다. 기존 사업 중에서 사회적 가치 창출이나 기업 이미지 제고 효과가 뛰어난 것들을 추리고, 나머지는 줄이거나 없애는, 이른바 ‘선택과 집중’이 한창이다. 일부 기업에서는 신규 사업이 사실상 중단되고, 기존 사업마저 위축되는 부작용도 나타난다. 올해 예산을 평년 대비 40% 가까이 줄인 삼성이 한 예다. 기름유출 사고를 계기로 지난해부터 시작한 지역 지원사업이 사실상 중단되고, 전국 소년소녀가장을 대상으로 매년 여름 실시하던 에버랜드 초청행사도 규모를 대폭 줄일 방침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낸 지정기탁금 100억원의 예산배정도 계속 늦추고 있다. 사회공헌정보센터의 곽대석 소장은 “기업들이 사회공헌 사업의 효과를 생각할 때 이미지나 홍보 같은 ‘기업적 관점’과 함께 사회적으로 시급한 복지서비스가 무엇이냐는 ‘사회적 관점’을 적절히 결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기업은 구조조정 속에서도 그동안 지속적으로 시행해온 핵심사업은 유지하면서 경제위기 속에서 필요한 신규 사업을 새로 찾는 노력을 펴고 있다. 교보 다솜이봉사단의 홍상식 과장은 “사회적기업 형태의 간병봉사단과 숲해설봉사단, 미숙아치료비 지원사업은 계속 이어가고, 보험업의 특성을 살리면서 경제위기로 의미가 더욱 소중해진 ‘가족’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행사를 새로 준비했다”고 소개한다. 가스공사는 경제난 속에서 사회적 일자리 창출을 위해 임직원이 반납한 임금으로 미취업 청년과 주부들을 뽑아 장애인을 돌보게 하는 ‘러브셰어링 봉사단’을 발족시켰다. 오시아이(OCI·옛 동양제철화학)는 2005년부터 시작한 ‘1사1촌 운동’을 올해도 계속해, 농번기 일손돕기와 마늘·고춧가루 등의 직거래 행사를 열 계획이다. 기업 사회공헌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이려는 시도도 눈에 띈다. 에스케이(SK)가 올해 본격화한 프로보너(전문가 자원봉사)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회사 안팎 전문가들의 자원봉사를 통해 사회적기업에 경영컨설팅을 하는 프로그램과, 요리·음악·뮤지컬 등 세 분야에서 젊은 인재들을 키워 ‘사회적 기업’으로 발전시키는 해피스쿨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에스케이텔레콤의 김도형 팀장은 “기업철학에 맞고, 기업자원을 활용할 수 있으며, 사회를 실제로 변화시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업에 집중해 차별화를 꾀한다”고 말한다. 이런 노력은 기업 사회공헌에 관한 종전 패러다임을 바꾸는 의미도 크다. 기업들은 지금까지 사회문제 해결의 주체는 정부나 시민사회단체이고, 자신들은 재정적·인적 지원을 해주는 역할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머무는 수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기업이 직접 사회문제 해결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인식이 늘고 있다. 곽대석 소장은 “기업 차원을 넘어 사회 전체로 사회공헌을 효율화하려면 기업-비정부기구(NGO)-정부 사이를 매개하는 ‘사회공헌 정보 데이터뱅크’ 같은 인프라 확보도 시급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경제위기를 맞아 사회공헌을 기업의 사회책임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인식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양용희 호서대 교수(사회복지)는 “사회공헌은 기업 사정에 따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사회공헌과 사회책임경영의 관계를 제대로 체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기업의 경영철학과 전략도 사회책임의 큰 틀 속에서 재정립하는 ‘전략적 사회책임경영(CSR)’의 필요성으로 이어진다. 아무리 경영성과가 좋고 사회공헌에 많은 돈을 써도 윤리·투명·준법경영을 제대로 못하면 사회적 존경을 받기 힘들기 때문이다. 전경련이 지난해 3월 사회책임경영 강화 선언과 함께 기업별 사회책임경영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전경련의 479개 회원사 중에서 위원회를 만든 곳은 아직 2.3%(11곳)뿐이다. 한국 기업들의 사회공헌은 지난 10년간 구가해온 양적 성장에 제동이 걸린데다, 전략적 사회책임경영이라는 질적 발전의 요구를 맞아, 중대한 전환점을 맞고 있다.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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