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 커”… 당장은 신중한 모습
경기회복 이후 대비 투자적기 저울질
경기회복 이후 대비 투자적기 저울질
“지금은 미묘한 시기다. 전략적 투자 타이밍을 놓고 고심 중이다.”
올 하반기 투자전망에 관한 4대그룹 한 재무담당 고위임원의 설명이다. 그가 연초 “생존이 급한 상황에서 투자를 늘리는 것은 정신없는 짓”이라고 말했던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다. 이명박 정부의 잇단 투자 확대 요청에 대해 상당수 그룹들은 “불확실성이 크다”며 여전히 신중한 모습이다. 하지만 삼성 등 국내 대표기업들은 최근 한국경제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나오는 것에 발맞춰 경기회복 이후 기회 선점을 위한 전략적 투자시점을 놓고 저울질이 한창이다.
정부는 2일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리는 3차 투자·일자리 민관합동간담회를 앞두고 대기업에 투자확대를 압박하고 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29일 전경련 경제정책위원회에서 “기업 설비투자 위축이 안타깝다”고 대놓고 말했다. 윤진식 청와대 경제수석은 대통령이 방미 중인 6월 중순 10대그룹 구조조정본부장급 임원들을 직접 불러 사전 정지작업을 벌였다. 투자 애로사항을 점검한다는 명분이었지만, 기업들은 압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4대그룹의 한 홍보담당 임원은 “투자가 안되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는 복합적 의미가 담겨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간담회에서 재벌총수들에게 투자환경개선을 위한 대책을 ‘당근’으로 내놓으며, 투자 확대를 주문할 예정이다.
최근 정부는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2%에서 -1.5%로 상향조정했다. 또 내년 성장률도 4% 내외로 전망했다. 이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전망치인 1.5%는 물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3.5%보다도 높다. 정부는 상반기에는 재정의 조기집행 효과를 보았지만, 정부 돈줄이 마르는 하반기에는 민간투자 활성화가 절실하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대다수 기업들은 “아직 때가 이르다”며 신중한 모습이다. 전경련의 한 임원은 “기업투자의 관건은 결국 시장수요의 회복 여부”라며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는 커지고 있지만 아직 수요가 본격적으로 살아나는 수준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경제위기 이전부터 논란이 돼온 공급과잉 문제가 여전하고, 기업·금융 구조조정이 진행 중인 것도 변수다. 전경련이 30대그룹의 올해 투자동향을 중간점검한 결과도 연초 조사 때와 큰 차이가 없다. 전경련의 간부는 “투자가 지난해보다 줄어들 것은 확실하다”며 “그나마 상반기보다 하반기 감소폭이 작은 게 위안”이라고 말했다. 30대그룹 중에서 지난해보다 투자를 늘리겠다고 밝힌 곳은 포스코·지에스 등 소수에 불과하다. 재계에서는 청와대 간담회에서는 정부와 기업이 경제회복을 앞당기는 데 함께 노력한다는 선언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하지만 선제적 투자론의 부상 등 새로운 변화의 조짐도 나타난다. 4대그룹의 한 재무담당 고위임원은 “국내 대기업들이 글로벌 경쟁기업들에 비해 금융위기의 충격에서 상대적으로 빨리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이면서 지금보다는 올해 4분기 이후를 더 희망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면서 전략적 투자 타이밍에 대한 고심을 내비쳤다. 과거 경험으로 보면 불황의 끝자락이 선제적 투자의 적기인 경우가 많았다. 경쟁기업들이 아직 기운을 차리지 못한 상태이고, 투자비용이 상대적으로 싸지는 것도 유리한 요인이다. 삼성경제연구소의 김종년 수석연구원은 “미래에 대한 확신은 부족하지만 너무 늦으면 기회를 놓칠 수 있기 때문에 경영자들의 마음이 하루에도 수시로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의 고위임원은 “기관마다 올해와 내년 전망이 엇갈리고 있다”며 “지금은 투자적기에 대해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힘들고, 사업 아이템별로 판단이 다를 수밖에 없는 미묘한 시기”라고 말했다.
정부가 투자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하고 간섭하는 것에는 대다수 기업들이 이구동성으로 못마땅해 한다. 4대그룹의 한 재무담당 임원은 “만약 투자가 잘못되면 정부가 책임질 거냐”며 “하물며 초등학생도 100원을 가지고 무엇을 사먹으면 제일 좋을지 아는데, 투자는 기업들에게 맡기라”고 말했다. 10대그룹의 한 임원은 “대통령이 아무리 하라고 해도 몇조씩 들어가는 투자를 주먹구구식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고 잘라말했다. 일각에서는 재계가 과거 정부에서 투자부진 이유를 반기업정서와 출자총액제한제 규제 탓으로 돌린 게 부메랑이 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친기업을 표방하고 출총제를 없앤 현 정부가 투자확대를 요구하면서 경기 탓만 하기는 궁색해졌다는 것이다.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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