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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불황기 기업들, 소크라테스에 길을 묻다

등록 2009-07-15 21:29

지난 4일 서울대 모아 미술관에서 롯데백화점 팀장급 이상 고위 간부들이 서울대 김춘수 교수(서양화과)로부터 ‘현대 미술의 이해’를 주제로 한 강의를 듣고 있다.  롯데백화점 제공
지난 4일 서울대 모아 미술관에서 롯데백화점 팀장급 이상 고위 간부들이 서울대 김춘수 교수(서양화과)로부터 ‘현대 미술의 이해’를 주제로 한 강의를 듣고 있다. 롯데백화점 제공
“고전에서 배우자” 인문학 공부 바람
“여기 마네가 그린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보세요. 이 그림에서 비로소 회화의 평면성이 강조됩니다.”

지난 4일 오전 서울대 모아 미술관 2층 강의실. 김춘수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가 30여명 남짓되는 학생들 앞에 섰다. 강의 주제는 ‘현대 미술의 이해’였다. 현대 미술사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과 그 의미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얼핏보면 평범한 대학 강의실 풍경이다. 그러나 이날 강의실에선 서울대 학생들을 한 명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노트 필기를 해가며 김 교수의 강의를 경청한 이들은 롯데백화점의 팀장급 이상 간부들이다. 이철우 대표와 신영자 사장도 맨 앞자리에 앉았다.

수업은 3교시까지 이어졌다. ‘한국 도자의 발달과 교류’ ‘이집트 피라미드 건축을 통해 본 삶과 죽음’ 등 1~3교시 강의가 모두 인문학으로만 이루어졌다. 이동우 롯데백화점 경영지원부문장은 “기존 경영방식만 고수해선 2018년 매출 200조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며 “직원들이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고 자유로운 발상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 위해 이런 교육과정을 개설했다”고 설명했다.

롯데백화점·포스코 등 임직원들 대상 강좌
“경영학으론 위기해법 못찾아 다시 근본으로”

■ 소크라테스에게 경영을 묻다 인문학 공부에 빠진 기업들이 늘고 있다. 선진국의 최신 경영기법을 습득하는 데 급급했던 기업들이 올들어선 ‘고전’을 배우느라 여념이 없다.

롯데백화점은 지난달 13일 ‘서울대 AFP(Ad Fontes Program)-롯데백화점 인문학 과정’을 개설했다. 서울대 인문대가 민간 기업과 별도의 인문학 과정을 개설한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아드 폰테스’는 중세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들이 즐겨 외치던 슬로건으로 ‘원천으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강의 주제로 철학과 문학, 역사, 예술 등 인문학의 여러 분야를 두루 담았고, 사전에 독서과제도 부여했다. 직원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중시하는 롯데는 인사고과에 역사시험 점수를 반영하기도 한다.


포스코 정준양 회장도 인문학 공부를 중요시하는 대표적 시이오(CEO)다. 지난 5월 포스코는 임원과 그룹 리더, 외주협력사 임원 등 총 919명을 대상으로 한 ‘수요 인문학 강좌’를 신설했다. 평소 정 회장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문과와 이과를 아우르는 통섭형 인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해왔다. 강좌는 소크라테스로 시작해, 니체와 칸트, 괴테, 마키아벨리 등 서양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커리큘럼을 짰다. 내년엔 동양고전과 역사학도 공부할 예정이다.

각종 연구소와 경제단체들이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인문학 강좌도 인기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올해 ‘시이오 독서 아카데미’ 2기 과정을 열면서 인문학 강좌를 대거 늘렸다. ‘괴테의 작품 세계’나 ‘중국 고전에서 찾는 리더의 자질’, ‘햄릿을 통해 본 인생’ 등 동서고금을 망라했다. 독서 아카데미를 주관하는 대한상의 윤옥현 과장은 “저녁모임이 잦은 시이오들이 매주 수요일만 되면 만사 제쳐놓고 강의를 들으러 오기 때문에 출석률이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한국능률협회의 ‘지혜의 향연’이나 삼성경제연구소의 ‘메디치 21’, 성공회대의 ‘시이오를 위한 인문학 과정, 인문공부’ 등도 고전을 공부하려는 기업인들로 북적대는 강좌들이다.


지난 5월13일 서울 대치동 포스코센터에서 연세대 김형철 교수(철학과)가 포스코 간부들을 대상으로 ‘소크라테스에게 경영을 묻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포스코 제공
지난 5월13일 서울 대치동 포스코센터에서 연세대 김형철 교수(철학과)가 포스코 간부들을 대상으로 ‘소크라테스에게 경영을 묻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포스코 제공
■ 불황일수록 검증된 ‘고전’ 찾는다 인문학 공부 열풍은 불황기의 특징으로 꼽힌다. 이정호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기존 경제질서가 흔들릴 만큼 경제위기의 골이 깊었던 만큼 새로운 해결책에 갈증을 내고 있는 시기”라며 “시이오들이 과거로부터 지혜를 빌리기 위해 고전을 많이 찾고 있다”고 분석했다. 경영학으로는 위기를 타개할 해법을 찾기 어려운 만큼 원점에서 다시 근본을 배우겠다는 것이다.

최근 화두로 떠오른 ‘메디치(Medici) 경영’에 대한 관심도 기업들의 인문학 공부를 부추기고 있다. 메디치 경영이란 서로 이질적 분야를 접목시켜 새로운 시너지를 창출하는 기업 경영방식이다. 중세 유럽에서 과학자와 예술가, 시인, 철학자들이 활발히 교류해 창조적 결과물을 내놓은 데서 유래했다. 기존 질서를 뛰어넘는 창조적 경영을 이루기 위한 밑거름으로 ‘고전’이 주목받는 이유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최근 시이오 1233명을 대상으로 추천도서를 조사한 결과에서도 <삼국지> <손자병법> <군주론> <도덕경> 등 동서양의 다양한 고전을 추천한 이들이 많다. 시이오들은 최근 독서 화두로 ‘전문적 교양지식 습득’(28.7%)을 가장 많이 꼽았다. ‘경제위기 원인의 이해’(8.9%)나 ‘불황기 소비자 마음 읽기’(4.3%) 등 경영에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화두는 상대적으로 후순위였다.

‘시이오를 위한 인문학 과정’을 개설한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굳건한 것처럼 보여졌던 기업들이 무너지면서 과거 경영방식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시기”라며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찾아나가는 인문학의 근본정신을 배우는 것은 지속가능한 기업 경영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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