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그룹 ‘경영권·재산다툼’ 조사해보니
계열분리·경영승계 13곳중 80%가 ‘골육상쟁’
형제다툼 최다…총수 ‘황제경영’ 지배구조탓
계열분리·경영승계 13곳중 80%가 ‘골육상쟁’
형제다툼 최다…총수 ‘황제경영’ 지배구조탓
우리나라 재벌 총수 일가의 ‘골육상쟁’은 아주 특별하고 예외적인 일일까?
<한겨레>가 5일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형제의 난’을 계기로 국내 20대 그룹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경영권이나 재산을 둘러싸고 총수 일가 간에 다툼이 일어난 그룹이 그렇지 않은 곳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영권이나 재산, 계열 분리 등을 둘러싸고 총수 일가 사이에 다툼이 최소 한 번 이상 일어난 곳은 금호아시아나, 한진, 두산, 현대, 현대차, 한화, 롯데, 대림, 삼성, 대한전선 등 10곳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계열 분리 과정에서 다툼이 없었던 곳은 엘지, 지에스, 엘에스 등 3곳뿐이다.
나머지 에스케이, 현대중공업, 에스티엑스, 씨제이, 동부, 신세계, 효성 등 7개 그룹은 계열 분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거나, 2·3세의 나이가 어려 경영권 승계나 상속이 이뤄지지 않은 곳들이다. 일부는 아들이 하나뿐이어서 아예 다툼의 소지가 없는 곳들도 있다. 결국 경영권 승계, 재산 분배, 계열 분리가 이뤄진 13개 그룹 중에서 다툼이 있었던 곳은 10개로, 거의 80%에 이르는 셈이다.
혈족 다툼을 겪은 그룹들을 유형별로 살펴보면, ‘형제의 난’을 겪은 곳이 금호, 한진, 두산, 현대, 현대차, 한화, 롯데 등 7곳으로 가장 많다. 특히 금호와 한진은 현재도 형제간 다툼이 진행중이다. 재계 1위인 삼성은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걸친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과 장남인 이맹희씨 간에 갈등이 있었고, 삼남인 이건희 회장으로 승계가 이뤄진 뒤에도 형제·조카와의 계열 분리 과정에서 크고 작은 갈등이 불거졌다. 또 대한전선은 부자간에, 대림은 삼촌과 조카 간에 다툼이 있었다.
계열 분리 과정에서 다툼이 없었던 엘지, 지에스, 엘에스 등은 모두 엘지라는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범엘지 계열’이다. 구씨와 허씨 두 대주주 가문의 동업이라는 특유의 경영 체제를 58년이나 유지해 온 엘지는 경영권과 재산을 둘러싼 다툼이 끊이지 않는 국내 재계에서 큰 잡음 없이 대규모 분가를 이뤄낸 거의 유일한 사례다. 정상국 엘지 부사장은 “두 가문의 아름다운 이별이 가능했던 것은 인화와 양보정신, 유교적 가풍에 의한 위계질서, 철저한 재산 비율 준수, 후계자들에 대한 철저한 능력 검증 덕분”이라고 말했다.
재벌 총수 일가의 다툼이 더 늘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재계 3위인 에스케이는 최태원 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가 이뤄졌지만, 형제·사촌형제간 계열 분리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특히 창업주인 최종건 회장의 자제들인 최신원 에스케이씨 회장과 최창원 에스케이케미컬 부회장과의 분리가 관건이다. 에스케이 안에서는 ‘형제 경영’으로 주위의 부러움을 샀던 금호와 두산이 잇따라 분쟁에 휘말린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가 부쩍 늘고 있다. 에스케이의 한 고위 임원은 “총수 일가는 물론 주변에서 보좌하는 전문경영인들이 눈앞의 이해관계보다는 좀더 긴 안목을 가지고 현명함과 자제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했다. 효성도 조석래 회장의 아들 삼형제가 모두 40대여서, 승계 문제가 당면 과제다. 나머지 에스티엑스, 씨제이, 동부, 신세계는 아들이 한 명씩이고, 현대중공업만 아들이 두 명이다.
한국 재벌의 혈족 다툼이 많은 이유로는 총수들이 절대 권한을 행사하는 이른바 ‘황제 경영’으로 상징되는 후진적 지배구조가 꼽힌다. 총수의 2·3세일지라도 경영 능력에 대한 객관적 검증을 통해 후계자나 경영자를 선정하는 시스템이 없다 보니, 결정권을 쥔 총수가 갑자기 죽거나, 총수 일가 안에서 이견이 생기면 곧바로 큰 분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투자자와 임직원, 거래 기업 등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있는 기업을 마치 개인 재산처럼 여기는 인식과도 맞물려 있다. 전경련의 한 간부는 “절대 권한을 행사하는 총수 일가 안에서 내분이 벌어지면 월급쟁이인 전문경영인들이 조정, 견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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