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적대적 M&A때 신주 헐값발행 경영권 방어
기재·법무부에 밀려 금융·공정위까지 ‘투항’
총수 지배권강화 …길게보면 경쟁력 추락
기재·법무부에 밀려 금융·공정위까지 ‘투항’
총수 지배권강화 …길게보면 경쟁력 추락
포이즌 필은 기업이 적대적 인수합병 위기에 처했을 때 기존 주주들에게 싼값으로 신주를 발행해 우호세력 지분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법무부는 정기국회에 상법 개정안을 낼 계획이다. 하지만 경제학자나 시민사회단체들은 정부의 도입 논리에 설득력이 약하고, 재벌 총수의 지배권 강화, 소수주주 권익 침해, 시장경제의 효율성 저하 등의 폐해를 낳아 한국 경제에 ‘독약’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정부는 도입 이유로 기업들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사내에 쌓아둔 수백조원의 유보금을 설비 투자 등에 활용할 수 있다며 ‘경영권 안정=투자 확대’의 등식을 내세운다. 하지만 정부가 같은 명분으로 출자총액 제한제 폐지, 금산분리 완화를 강행했음에도 투자 확대 효과가 없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다는 지적이 많다. 삼성의 한 고위 임원도 “기업 투자는 규제 영향도 받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경기 흐름과 투자 수익 여부 아니겠냐”고 털어놓는다. 공정위 분석에서도 지난 3월 출총제 폐지로 투자 한도가 늘어난 삼성·현대차 등 31개 대기업이 현금만 쌓아놓고, 투자는 소극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미국·일본·유럽에서 이미 도입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사외이사나 기관투자가들의 견제 역할이 미흡한 한국은 선진국과 상황이 다르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백용호 국세청장조차 공정위원장 시절 “기업들이 경영을 잘못하면 경영권을 잃을 수 있다는 위협을 느껴야 시장경제 발전이 이뤄진다”며 반대했을 정도다. 김우찬 경제개혁연구소장(한국개발연구원 교수)은 “유럽 기업들을 조사한 결과 포이즌필·차등의결권주 같은 주요 경영권 방어수단 중 단 한 가지도 채택하지 않은 곳이 56%나 된다”고 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경영권 공격수단에 비해 방어수단이 취약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국내에서 적대적 인수합병의 사례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경영권 과보호라는 지적도 많다. 공정위 간부는 “2003년 외국 자본인 소버린이 에스케이의 경영권을 위협한 적이 있지만, 결국 이사회 중심 경영 등 지배구조 개혁에 좋은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국외 투자 유치에도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공정위는 앞으로 포이즌 필 도입을 위한 상법 개정안을 부처들끼리 협의할 때 부작용이 최소화하도록 노력할 방침이다. 공정위 간부는 “포이즌 필의 요건을 엄격히해서 경영권 과보호나 기업 인수시장 위축 같은 부작용을 막을 방침”이라고 말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포이즌 필의 발동 기준이 기존 경영진이나 대주주의 이익이 아니라 전체 주주와 회사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마련돼야 한다”며 “포이즌 필의 발동 요건, 유효 기간, 갱신 조건 등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했다.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