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G에서 치약까지, 대·중소기업 예외없어
일·중 등 제재 강화…국제흐름 외면땐 ‘재앙’
일·중 등 제재 강화…국제흐름 외면땐 ‘재앙’
“담합(짬짜미·카르텔)은 무슨 얼어 죽을…, 물증 있습니까?”
짬짜미 혐의로 6700억원이라는 역대 최대의 과징금이 부과된 엘피지(LPG) 판매업체 가운데 한 관계자가 공정거래위원회 조사과정에서 혐의를 부인하며 한 말이다. 이 업체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짬짜미 합의서 같은 분명한 증거도 없으면서 무리하게 제재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경쟁사의 임직원과는 만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선진국에서는 만난 사실 자체를 짬짜미의 중요한 증거로 삼는다. 가격이나 거래조건, 물량 등에 관한 단순한 정보교환이나 접촉도 의심받을 수 있다.” 지난달 대한상공회의소·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이 국내기업의 짬짜미 예방을 위해 선포한 ‘행동준칙’의 내용이다. 적발된 엘피지 판매업체들은 대한상의나 전경련의 회원들이다.
공정위 조사결과 엘피지 수입사들은 가격 담당자들이 2003년부터 6년 동안 매달 전화나 모임을 통해 상대방 가격을 미리 확인하거나 변동폭을 협의한 뒤 판매가를 비슷하게 결정했다. 정유사들도 수입사에 엘피지를 사들일 때 가격정보를 통보받은 뒤 비슷한 값에 되팔았다. 엘피지 업체들이 ‘단순한 정보교환도 짬짜미의 중요한 증거’라는 행동준칙에도 불구하고, ‘물증이 없다’거나 ‘단순히 수입업체의 가격을 모방했다’고 억울해하는 것은 아직도 ‘시장경제의 공적’으로 불리는 짬짜미의 심각성에 둔감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정호열 공정거래위원장도 지난 16일 내년도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짬짜미에 대한 기업들의 의식과 관행의 개선이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공정위는 내년 업무보고에서 사실상 짬짜미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경제위기로 독과점이 심해지면서 소비자들의 짬짜미 피해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데다, 국제적인 제재도 갈수록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엘피지 짬짜미’만 봐도 업체들이 6년간 짬짜미를 통해 올린 매출은 21조원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으로 따지면 부당 이득이 2조원을 넘는다.
삼성·엘지 같은 수출 대기업들은 그동안 선진국 경쟁 당국에 짬짜미가 적발돼 천문학적인 벌금·과징금과 인신구속이라는 값비싼 수업료를 치른 뒤 잘못된 관행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펴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미국과 유럽연합 등이 한국 업체에게 부과한 벌금·과징금은 2조원에 육박한다. 문제는 내수 위주의 기업이다. 이번 엘피지 사건에서 드러나듯 이들은 아직 국제 흐름에 둔감한 편이다. 공정위의 짬짜미 제재건수는 지난 1999년의 34건에서 지난해 65건으로 10년간 갑절 가까이 늘었다. 올해 제재를 받은 엘피지(과징금 6689억)·음료수(255억)·스펀지(75억)·통신선(66억)·레미콘(48억)·치약·선물세트(19억) 등 주요 사건에는 에스케이·엘지·롯데·지에스·씨제이 등 주요 그룹 계열사들이 망라돼 있다. 또 독과점 지위에 있는 대기업들이 주로 짬짜미를 하지만, 스펀지나 군납김치 사건이 보여주듯 중견·중소기업들도 예외가 아니다. 공정위가 현재 조사를 진행 중인 사건만 소주·디지털 음원·주택공사 아파트 입찰·4대강 입찰 등 손가락으로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짬짜미 관행은 앞으로 해당기업에 큰 재앙이 될 것이라는 경고가 많다. 미국·유럽에 이어 최근 들어 일본·중국까지 제재를 강화하는 추세다. 최무진 공정위 카르텔조사과장은 “미국과 유럽연합은 카르텔 제재를 최우선 정책으로 이미 공표했고, 일본도 전담인력을 늘렸다”고 말했다. 최대 교역국인 중국도 지난해 반독점법 체제를 도입해서 칼을 갈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의 김영용 원장은 “중국이 외국업체에 대한 경쟁법 적용을 강화할 것으로 보여 우리도 대비하지 않으면 큰 어려움이 예상된다”면서 “내년 1월 말 대규모 심포지엄을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시민단체나 소비자가 짬짜미 피해에 대해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 엘피지 사건의 경우 참여연대가 이미 소송방침을 밝힌 데 이어, 장애인단체들도 100만 대의 장애인 차량을 기준으로 3조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짬짜미 근절을 위해서는 정부도 인식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정부가 한쪽에서는 제재를 강화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행정지도를 명분으로 짬짜미를 사실상 조장한다는 볼멘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