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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발소리도 쉿!’ 시계 장인들, 시간을 빚다

등록 2010-01-26 21:30수정 2010-01-27 00:08

‘발소리도 쉿!’ 시계 장인들, 시간을 빚다
‘발소리도 쉿!’ 시계 장인들, 시간을 빚다
스위스 명품시계 ‘예거 르쿨트르’ 공방 가보니
왓치메이커 200명, 고요한 작업실서 현미경으로 작업
직원 한명당 연 50개만 만들어…값은 수백만~수십억




300여년 전 프랑스 신교도(위그노)들은 동쪽 쥐라산맥을 넘었다. 유럽 전역으로 퍼진 종교개혁의 물결을 좇은 그들은 구교의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으로 향해야 했다. 시계 왕국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스위스 제네바 인근 ‘워치 밸리’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된다. 당시 신교도의 주축은 노동의 대가를 중시하는 상공인들이었고, 제네바는 귀금속 공예의 중심지였다. 신교도의 정신과 제네바라는 공간의 결합이 명품 시계의 산실로 이어진 것이다.

제네바에서 북쪽으로 1시간 반 차를 달려 도착한 발레 드 주의 르 상티에에는 시계공방 수십 곳이 모여 있다. 각 공방은 역사와 제품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까지 운영하며, 어떻게 세계 유명 브랜드가 될 수 있었는지를 자랑한다.

‘예거 르쿨트르’도 그런 브랜드 가운데 하나다. 1833년 이곳으로 터를 잡은 뒤 지금도 시계 제작 전 과정을 한데 모아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예거 르쿨트르 공방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엄청난 집중력을 요구하는 까닭에 발소리를 내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흰 가운을 입은 공방 직원들은 대부분 손작업으로 시계를 만든다. 현미경으로 작업에 몰두하는 그들 모습은 시계를 ‘만든다’기보다 ‘빚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싶다. 공방에선 1000여명이 시계 제작에 참여하지만, 이 가운데 시계의 장인인 ‘워치 메이커’로 불리는 이들은 200명 남짓이다.

공방은 시계 디자인에서부터 시작해 기계장치 개발, 부품 제작, 최종 조립까지 마무리할 수 있는 곳이다. 예거 르쿨트르의 홍보담당 에스텔 네그렐로는 “하나의 시계가 개발되기까지는 평균 4년, 시계를 실제로 만드는 데는 6개월이 걸린다”고 말했다. 금형으로 원재료에서 부품 본을 뜨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작업을 손으로 하는데도, 1마이크로미터(0.0001㎜)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다. 한 해에 만드는 시계는 약 5만개, 직원 한명당 50개에 불과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예거 르쿨트르가 2010년 새모델
예거 르쿨트르가 2010년 새모델
시계의 생명은 정확성이라지만, 사람 손으로 만드는 시계가 세상에서 가장 정확할 리 없다. 그리니치 표준시(GMT)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디지털시계를 따를 기계시계는 드물다. 그러나 명품 시계를 찾는 이들은 시계의 외면적 기준보다 시계에 담긴 사람의 혼과 땀의 결실에 더 열광한다. 부산에서 시계 편집매장을 운영하면서 직접 시계를 주문하려고 제네바를 찾은 이춘희 대표는 “얼마나 공부하는 브랜드냐에 따라 소비자들의 호불호가 갈린다”고 말했다. 시계의 기계장치(무브먼트)에 상상력을 얼마만큼 불어넣었느냐가 브랜드 평가 기준이라는 얘기다.

수공 기계시계의 가격은 수백만원에서 수십억원짜리까지 다양하다. 예거 르쿨트르가 2010년 새 모델로 내놓은 제품 가운데는 6억5000만원짜리도 있다. 여기에 소비자가 원하는 디자인과 보석 등을 보태면 수십억원 단위로 바뀐다. 이런 가격을 유지할 수 있는 배경을 묻자, 예거 르쿨트르 관계자는 ‘희소성’을 내세웠다. 희소가치 유지를 위해 주력 제품은 한정 수량만 시장에 내놓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는 투자 목적으로 명품 시계를 찾는 이들도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국내 소비자들에게 스위스산 수공 시계가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브랜드 이름이 국내 소비자들의 귀에도 익게 된 것은 대형 유통업체들이 이들 시계 브랜드들을 적극 유치해 관리한 뒤부터다. 가령 롯데백화점은 2005년부터 ‘크로노다임’이라는 시계 편집매장을 운영하면서 스위스산 명품 브랜드들을 직접 주문해 들여와 복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우려를 줄여가고 있다.

명품 중의 명품이라지만, 스위스 시계가 항상 호황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특히 세계 금융위기에 따른 경기침체의 영향을 스위스 시계산업도 피할 수 없었다. 스위스 시계산업연맹(FH)은 지난해 11월 말까지 시계 수출액이 120억 스위스프랑(약 13조3000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24%나 줄었다고 밝혔다. 최근 조금씩 살아나고 있는 소비심리와 신흥국 명품 소비의 증가가 그나마 기댈 언덕이다. 스위스 고급시계협회 홍보담당 잔프랑코 리첼은 “중국과 동남아시아, 한국 같은 나라의 고급시계 시장은 경기침체에도 10~20%씩 성장하며 마치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제네바/글·사진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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