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
[열려라 경제] 이정우의 경제이야기
이번 월드컵에서 스페인이 첫 우승을 했다. 스페인팀의 주역 11명 중 6명이 바르셀로나 축구팀 소속이라고 하는데, 며칠 전 바로 그 팀이 한국에 와서 좀 찜찜한 경기를 하고 갔다. 바르셀로나라고 하면 우리에게는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을 우승한 곳으로 기억되지만 스페인 현대사에서는 핍박과 저항의 대명사로 통한다.
1936년 2월 총선에서 좌파 인민전선이 승리하자 7월 프랑코가 군부 반란을 일으켜 내전으로 비화했다. 이 내전은 공화국 군대와 반란군 사이의 전쟁인 동시에 좌파 대 우파, 자유민주 대 파시즘, 지방분권 대 중앙집권의 대결이었다. 소련, 멕시코와 해외 민주인사들이 공화국을 지지했다. 조지 오웰은 “스페인의 역사는 1936년에 정지됐다”고 개탄했고,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쓴 헤밍웨이는 공화국 군대의 구호차 구입을 위해 4만달러를 기부했다. 반대로 히틀러, 무솔리니는 프랑코를 지원했다. 내전은 1939년 프랑코의 승리로 막을 내렸고, 내전과 전후 보복 때문에 수십만명이 희생됐다.
프랑코 정권하에서 소수민족이 사는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에서는 자치제가 폐지되고, 고유 언어조차 사용이 금지됐다. 카탈루냐의 중심 도시가 바로 바르셀로나이다. 인민전선을 지지하고 프랑코의 독재에 끝까지 맞섰던 파블로란 이름을 가진 두명의 위대한 예술가가 있었으니 파블로 카살스와 파블로 피카소. 카탈루냐 출신의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는 프랑코 정권을 외교적으로 승인하는 국가에서는 연주를 거부한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그는 영국에서 한번도 공연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공연의 맨 끝에는 반드시 카탈루냐 지방의 민요 <새>라는 짤막한 곡을 연주했다.
피카소는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가 1937년 독일 공군의 공습을 받아 1천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에 분격해서 <게르니카>란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그는 1973년 죽을 때 스페인이 민주화한 이후에야 <게르니카>를 스페인으로 옮기라는 유언을 남겼고, 오랫동안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던 그 그림은 지금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독재자 프랑코는 장기집권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영화와 스포츠에 집중 투자했다. 1947년에 벌써 500석 규모의 영화관이 3천개나 있었다. 스포츠 중에서는 민족주의 고취 수단이 되는 축구를 특히 좋아했다. 1948년에 레알 마드리드 팀을 창설해서 10만명 규모의 경기장을 만들었고, 바로 이어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바르셀로나팀을 창설했다. 지금도 두 팀은 앙숙 중의 앙숙이며, 두 팀의 대결은 1936년 내전을 연상시킨다. 바르셀로나팀은 가슴에 흔한 기업 로고 대신에 ‘유니세프’(UNICEF)를 달고 뛰는데 이는 역사적 배경을 보면 이해가 된다. 프랑코는 1975년 죽을 때 “국민 여러분의 용서를 빕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언제쯤이면 카탈루냐와 바스크 사람들의 마음속에 원한이 풀리고 두개의 스페인이 하나가 될까?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