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훈 본부장 ‘협정문 수정’ 시사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과 관련해 지금까지 스스로 강조해온 ‘원칙’을 노골적으로 뒤집고 있다. 2007년 6월 체결·서명한 협정문을 고칠 수도 있다는 의사를 비치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17일 “미국 자동차업계의 요구가 오바마 행정부에게 매우 중요한 상황”이라며 “자동차 분야 논의를 하다 보면 협정문 본문을 건드려야 하는 게 나올 수 있고, 이 경우 과감하게 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점(.)이든 콤마(,)든 협정문에 다시 찍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공언하던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앞서 16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 출석해 미국 쪽의 협정문 수정 요구를 시인하면서 “협정문이 변경되는 부분이 있다면 국회에서 재비준 절차를 거치겠다”고 말을 바꾸었다.
미국의 재협상 전략은 ‘자국 시장은 더 닫고, 한국 시장은 더 열도록 한다’로 요약된다. 가장 파격적인 것은, 협정문의 뼈대인 자동차 관세 철폐 시한까지 연장해 달라는 요구다. 협정문에는 협정 발효 뒤 미국은 한국산 승용차에 대한 2.5% 수입 관세를 즉시 또는 3년 동안 단계적으로 없애기로 했다. 반면 한국은 미국산 자동차에 대한 8% 관세를 바로 철폐한다. 그런데도 미국은 이번 재협상에서 관세 폐지 기한(3년)의 연장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김 본부장이 구체적인 기간을 밝히진 않았지만, 미국 하원 세입위원회는 관세 2.5%를 1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철폐하도록 요구한 바 있다. 김필수 대림대 교수(자동차과)는 “유럽·일본 차와 경쟁이 치열한 미국 시장에서 관세 철폐는 한국 차의 핵심 경쟁력”이라며,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국내 자동차산업의 혜택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은 또 자동차 수입이 급격히 증가해 자국 산업에 피해가 생길 경우 다시 높은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제도인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처) 도입을 요구했다. 이에 통상교섭본부는 “양국 모두에 적용 가능한 장치라면 검토 가능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함께 적용되더라도 자동차 수출이 많은 우리나라에 일방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한국산 자동차는 미국에 45만대 수출됐지만, 미국산 자동차의 수입량은 고작 6000대다.
자동차 분야를 수정하면 전체 ‘이익의 균형’이 무너진다. 협정으로 얻는 한국의 이득 가운데 자동차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도 농축산업이나 금융, 서비스 분야 등은 두루 손해지만, 자동차 분야는 큰 이득이라고 주장해 왔다. 산업연구원이 작성한 ‘한-미 에프티에이 시대에 대응한 주력산업의 구조 고도화 방안’이란 보고서를 보면, 협정 발효에 따라 제조업의 대미 수출이 13억8700만달러, 무역수지가 7억9600만달러 증가하는 요인이 생긴다. 이 가운데 자동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수출의 60.27%(8억3600만달러), 무역수지의 95.98%(7억6400만달러)이다.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미국의 요구가 거센 이유는 최근 한-미 역학관계 때문으로 풀이된다. 천안함 사고나 전시작전통제권 회수 연기 때 이명박 정부에 힘을 실어줬으니, 이제 그 빚을 갚으라고 미국이 나선 셈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한-미 에프티에이가 단순히 경제의 문제가 아니고 한-미 관계 전체와 연결되는 문제라는 점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한국 쪽도 맞대응 카드를 내밀어 ‘주고받기’ 협상을 이끌어야 한다고 통상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최원묵 이화여대 교수(법학)는 “3년 전 합의할 때와 달리 미국이 자국 자동차산업의 몰락을 이유로 재협상을 요구한다면 우리도 2008년 금융위기에 따른 사정 변경을 이유로 금융서비스 분야의 수정을 제안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위기 발생 뒤 세계 각국은 투기성 외화자금의 유출입 규제를 강화하는 추세인데 한-미 협정은 이런 흐름과 역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민주당에서도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등 독소조항 삭제를 포함한 전면 재협상론이 힘을 받고 있다. 천정배 최고위원은 “이미 미국의 요구를 상당부분 수용한 것 같고, 재협상도 기정사실화됐다”며 “정부는 협상팀을 새로 짜고 독소조항 제거를 위한 전면 재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정은주 황준범 이세영 기자 ejung@hani.co.kr
민주당에서도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등 독소조항 삭제를 포함한 전면 재협상론이 힘을 받고 있다. 천정배 최고위원은 “이미 미국의 요구를 상당부분 수용한 것 같고, 재협상도 기정사실화됐다”며 “정부는 협상팀을 새로 짜고 독소조항 제거를 위한 전면 재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정은주 황준범 이세영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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