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 회장의 사업구조
1993년 일본에 ‘시도상선’ 세워…20년만에 175척 운영
국내서 사업하고도 외국에 주소둔 비거주자로 위장
국세청 세금탈루 주장에 “국외등록은 관행” 반박
국내서 사업하고도 외국에 주소둔 비거주자로 위장
국세청 세금탈루 주장에 “국외등록은 관행” 반박
세금 4101억 추징당한 ‘선박왕’ 권혁
국세청으로부터 사상 최고액인 4101억원을 추징당한 권혁(61) 시도상선 회장은 국내 해운업계에서는 독보적 인물로 알려져 있다. 혼자 힘으로 해운업에 뛰어든 지 20년 만에 대형 선박 175척을 운영하는 세계적 선박임대 및 해운 업체를 일궈냈기 때문이다. 회사 관계자들은 그를 “무일푼으로 거대한 부를 쌓았지만 지금도 자동차 없이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소탈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국세청의 생각은 정반대다. 국세청은 그가 사실상 국내에서 사업을 하고 있음에도 외국에 주소를 둔 비거주자로 위장해 천문학적인 소득을 탈루한 ‘유령과 같은 인물’이라며 4000억원이 넘는 세금을 부과했다. 국제무대를 오가면서 수천억원의 검은돈을 주무르는 문제의 인물이냐, 아니면 맨손으로 세계적인 부호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냐를 놓고 논란이 예고되는 대목이다.
그의 인생 경로만 놓고 보면 나라 밖에서 성공을 거둔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평가는 맞는 듯하다. 경북고와 연세대 상대를 졸업한 뒤 현대자동차에 입사한 그가 맡은 업무는 자동차 선적 분야였다. 이때 현대자동차를 운송하던 일본 회사 ‘마루베니’와의 인연은 그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됐다. 1990년 현대자동차를 퇴사한 그에게 마루베니 쪽에서 자동차를 운송하는 해운업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당시 마루베니는 회사 운영자금까지 포함해 사업자금 전액을 대출해줘 일본 도쿄에 시도상선을 세우도록 했다.
맨손으로 출발한 그가 수조원의 재산을 보유한 ‘선박왕’으로 탈바꿈하게 된 데는 운도 크게 따랐다. 사실상 제로 금리인 일본 엔화 자금을 이용해 대형 선박을 잇따라 발주했는데, 당시 우리나라의 자동차 수출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자동차 운반선의 활용도가 높아진 것이다. 현대자동차 출신이라는 점도 큰 보탬이 됐다. 특히 2000년대 들어선 중국 호황 바람도 탔다. 선박 수를 늘려 벌크선, 탱커 등으로 사업을 넓히던 즈음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선박 수요가 갑자기 쏟아졌기 때문이다. 한때는 선박 임대료가 5~10배나 치솟았다. 해운업계 한 관계자는 “선박을 제조하려면 3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운송량이 한꺼번에 늘어나면 선박을 이미 확보한 선박임대업체가 엄청난 돈을 번다”고 말했다.
시도상선은 2005년 법인을 일본에서 홍콩으로 옮겼다. 홍콩은 법인세가 없이 개인소득세만 부과하고, 선박을 등록하면 10년간 세금을 면제해준다. 일본과 홍콩 등 사실상의 사업 결정이 모두 나라 밖의 본사에서 이뤄졌으므로 국내에 세금을 낼 의무가 없다고 시도상선 쪽이 주장하는 배경이다.
하지만 국세청은 권 회장이야말로 전형적인 역외탈세 사례라는 입장이다. 처음부터 세금을 내지 않을 의도로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서류상 회사)를 세운 뒤 그 회사가 외국의 본사에 투자하는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또 국세청은 권 회장이 국내에 생활근거지를 두고 실질적인 경영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국내 법인을 외국 본사의 대리점처럼 위장했다고 주장한다.
시도상선은 이에 대해 권 회장이 국내에서 한푼도 들고 나간 것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애초 일본에서 사업을 시작할 때 가진 돈이 없었고, 국외에서 성공한 뒤 지금은 오히려 한국 업체들을 돕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대로 한다면 거액을 탈세한 파렴치한 사업가가 아니라 일세의 풍운아인 셈이다.
이 밖에도 조세피난처를 수시로 이용하는 해운업계의 관행 때문에 국세청 과세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해운업체 한 관계자는 “몇 년 전만 해도 국내에 등록한 선박이 얼마 없을 정도로 국외 등록은 일반적”이라며 “중국 선박은 타이완(대만)에 입항할 수 없지만, 파나마 선박은 가능하기에 실제로 필수적인 영업수단으로 해운 교과서에도 나온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도 한국 선박의 국외 유출을 막기 위해 제주도등록특구를 마련해 세금 혜택을 주며, 영국이나 프랑스도 비슷한 선박등록제도를 운영한다. 국세청 과세를 둘러싸고 치열한 법정다툼이 예고된다.
정은주 조기원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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