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의 ‘대기업 역할론’과 재계 대응
작년 공정사회 화두땐 기업들 협력업체 상생안 발표
‘1조원 환원’ 약속했던 삼성·현대차 불똥 튈까 촉각
‘1조원 환원’ 약속했던 삼성·현대차 불똥 튈까 촉각
‘이번엔 뭘로 화답하나….’
이명박 대통령이 올해 8·15 경축사를 통해 ‘공생발전’화두를 꺼내든 데 이어, 지난 17일 국회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화에 대한 공청회’에서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등 경제4단체장이 집중포화를 맞자 재계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정부와 정치권의 압박에 마땅히 내놓을만한 ‘새로운 카드’가 없어서다.
4대 그룹의 한 임원은 “공생발전에 걸맞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검토해야하긴 하는데, 새로운 게 없어서 고민”이라며 곤혹스러워했다. 사실 정부 입맞에 맞출만한 카드는 이미 다 써버렸다는 게 재계의 고민이다. 이명박 정부가 집권 후반기 들어 대기업의 역할론을 강조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틀면서 빚어진 결과다.
그간 재계는 정부와 정치권의 ‘주문’에 빠르게 ‘화답’해왔다. 지난 2009년 8·15 경축사를 통해 이 대통령이 ‘친서민 중도실용’을 이야기한 뒤, 그해 말 삼성그룹·엘지(LG)그룹 등 주요 그룹은 제도권 금융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려운 서민들에게 대출해주는 미소금융재단을 잇따라 설립했다. 또 지난해 ‘공정 사회’ 화두가 던져졌을 즈음엔, 대기업들이 앞다퉈 협력업체와의 상생방안을 발표한 바 있다. 최근 삼성과 에스케이(SK)가 소모성 자재 구매대행(MRO) 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한 것도 동반성장 국정 기조에 발맞춘다는 차원이었다.
‘공생발전’의 실체가 또렷하지 않은 점도 재계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유다. 이 대통령은 건강한 기업 생태계, 일자리 만들기 등을 대기업에 요구했을 뿐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진 않았다. 또다른 4대그룹 임원은 “정부는 재계에서 뭔가를 해주길 기대하는 눈치지만 액션플랜이 뭐가 돼야 할 지는 모르겠다”며 “지금까지 해왔던 동반성장 활동을 이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경련도 공생발전과 관련해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당장 검토하지는 않고 있다.
가장 촉각을 곤두세운 곳은 삼성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삼성 특검’ 이후 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1조원가량의 차명재산을 ‘유익한 일’에 쓰겠다고 약속했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지 않았다. 글로비스 비자금 사건 이후 2013년까지 1조원의 사재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던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경우에도 지금까지 해비치재단에 출연한 금액이 1500억원에 불과하다. 최근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현대중공업 최대주주)가 사재 2000억원을 출연해 사회복지재단 설립 계획을 밝혔고,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이 “굉장히 잘한 것”이라고 추켜세운 것도 이들 기업으로선 신경쓰이는 대목이다.
8·15 경축사에서 예로 언급된 미소금융 홍보에 발빠르게 나선 기업도 있다. 최종태 포스코 사장은 20일 포항 죽도시장을 방문해 ‘미소금융 활성화’를 몸소 강조할 예정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 지난 10일 수원의 한 재래시장을 찾았던 것과 비슷한 차원의 행보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