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선수를 빼앗겼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28일 5000억원 상당의 현대글로비스 주식을 내놓겠다고 밝힌 데 대한 삼성그룹 관계자의 반응이다.
28일 삼성그룹 관계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건희(사진) 삼성전자 회장도 미래전략실을 통해 차명으로 숨겨놨다가 삼성 특검 이후 실명화한 삼성 계열사 지분 출연 발표를 서둘러왔다. 이 회장은 2008년 4월 ‘삼성 특검’ 뒤 삼성전자 회장에서 물러나면서 차명으로 갖고 있던 삼성 계열사의 지분 처리와 관련해 “실명 전환한 뒤 벌금과 누락된 세금을 납부하고 남은 것을 유익한 일에 쓰겠다”고 밝힌 바 있다.
삼성 미래전략실은 지난 4월 삼성경제연구소에 ‘사회공헌연구실’을 만들어 이 회장이 내놓기로 한 삼성 계열사 지분을 전략적인 목적과 효과적인 방법으로 출연할 방안을 찾아왔다. 삼성 관계자는 이 회장이 출연할 재산 규모에 대해 “차명으로 갖고 있다가 실명화한 삼성 계열사 주식 총액 2조1000여억원 가운데 세금과 벌금을 내고 남은 게 1조1000억원가량 된다”고 말했다.
삼성은 이 회장의 사재 출연 계획을 오는 31일로 예정된 30대 그룹 회장들의 청와대 모임 직후에 발표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모임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그룹 회장들에게 ‘공생발전’에 앞장서줄 것을 요청하면, 이 회장이 먼저 사재 출연 계획을 밝혀 화답하는 시나리오를 준비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소모성자재구매대행(MRO) 계열사인 아이엠케이(IMK) 매각과 최고경영진이 직접 참여하는 미소금융 홍보 사례에서 보듯, 삼성은 그동안 어차피 해야 할 것이라면 남보다 먼저 해 효과를 극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이번 청와대 모임은 이명박 대통령이 그룹 회장들에게 직접 8·15 경축사에서 밝힌 공생발전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협조를 당부하고, 모임 이후 각 그룹들이 돌아가며 공생발전 전략을 내놓는 형태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의 기습 발표로 이런 시나리오는 수포로 돌아갔다. 삼성 관계자는 “바로 이어 뒷북을 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해, 이건희 회장의 사재 출연 발표는 상당 기간 미뤄질 것임을 내비쳤다.
김재섭 기자 j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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