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지난달 28일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재판장 이인형)에 외교통상부가 보낸 한 장의 공문이 도착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한글본의 번역 오류 정오표를 제출하라는 재판부의 명령에 응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공공기관의 정보는 원칙적으로 국민에게 공개해야 하고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만 비공개할 수 있다. 그 특별한 사정을 재판부가 비공개 심사하려고 정보 제출을 명령했는데 이를 거부한 것으로 매우 이례적”이라고 평했다.
앞서 6월3일 외교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한글본을 재검독한 결과 296건의 번역 오류가 발견됐다며 새로 고친 한글본 협정문을 공개했다. 2007년 6월 공식 서명된 지 4년 만에 찾아낸 무더기 번역 오류였다. 외교부는 당시 35건의 정정사례만 밝히고 나머지 번역 오류 정오표는 공개하지 않았다.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의 번역 오류 정오표(207건)를 모두 국회에 제출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이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외교부 장관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재판부는 정정표를 일단 제출하라고 외교부에 명령했다. 그럼에도 외교부는 “상대측인 미국 정부가 한글본 오류 정정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외교 문서의 일부로 처리한 점에 비춰 (재판부) 제출에 어려움이 있다. 협상 관련 문서는 양국간 합의에 따라 발효 후 3년까지 비공개로 분류한다”며 거부했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최근 국정감사에서 국회에 정오표를 제출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미국 의회에서 비준 절차가 진행중이라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외교부의 이런 해명은 궁색하다. 미국 정부와 의회를 위해 한국 법원과 국회는 한글본의 무더기 번역 오류를 검증할 권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 번역 오류 정오표를 공개한 마당에 더 많은 이해관계자들의 관심이 쏠린 한-미 협정 정오표만 공개를 미루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다. 미국 쪽이 오류 정정을 ‘외교 문서’로 분류했다고 비공개 원칙을 들이대는 것도 미국을 지나치게 의식한 자기검열일 뿐이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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