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사진) 삼성전자 회장이 제일모직 주주대표소송 항소심에서 패소(<한겨레> 8월23일치 10면 참조)한 데 이어 대법원 상고를 포기해 업무상 배임에 따른 손해배상 판결이 최종 확정됐다. 경제개혁연대 등 시민사회단체가 삼성그룹의 편법승계를 문제 삼아 제기한 여러 건의 소송에서 상고를 포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7일 대구고법과 경제개혁연대 등의 말을 종합하면, 이 회장은 제일모직의 에버랜드 전환사채 인수 포기에 대한 업무상 배임(불법행위)을 인정해 130억여원의 손해배상 책임을 물린 대구고법의 항소심 판결에 대해 마감일인 12일까지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았다. 대구고법 민사3부(재판장 홍승면)는 지난달 22일 “전환사채는 이 회장의 장남 등에게 조세를 회피하면서 에버랜드의 지배권을 넘겨주기 위해 이 회장 등의 주도로 이뤄졌고, 명시적 또는 암묵적으로 제일모직에 전환사채 인수를 포기하도록 한 것은 업무상 배임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에버랜드는 1996년 전환사채를 헐값 발행했지만 제일모직은 실권했고, 대신 이 회장의 자녀인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등이 인수해 에버랜드의 주요 주주로 올라서면서 그룹 승계의 틀을 완성했다. 이에 2006년 장하성·곽노현 교수 등 법학교수 43명이 주주대표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이 회장의 이례적인 상고 포기는 삼성그룹의 태도 변화와 관련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경제개혁연대는 이날 논평을 내어 “이제껏 단 한번도 삼성 측이 스스로 소송을 중간에 접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상고 포기라는 법률적 행위마저도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재계에서도 그룹 총수 일가의 경영권 승계와 밀접히 관련된 소송에서 상고를 포기한 것은 과거 삼성에서는 없던 일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한 재계 관계자는 “상고 포기는 에버랜드의 헐값 전환사채 발행과 그 책임이 이 회장에게 있음을 인정한 것인데, 이재용 사장으로의 3세 승계 작업 그 자체인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과 관련한 불법성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 촌평했다.
경제민주화 및 재벌개혁 여론과 연결짓는 분석도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이건희 회장이 상고를 포기한 것을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라는 시대적인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변화의 시작으로 해석하고 싶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삼성그룹은 지난해와 올 초 중소기업·영세업종 침해와 일감몰아주기 논란이 불거지자 자회사인 아이마켓코리아 매각과 아티제 철수를 가장 빨리 결정하는 등 여론추이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조심스런 행보를 보여왔다. 삼성 계열사의 한 임원은 “지난해부터 소셜네크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의 변화, 경제민주화 움직임, 3세 승계 문제, 유산 소송 등 때문에 여론에 민감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삼성그룹 쪽 여러 관계자들은 “소송을 마무리하겠다는 것일 뿐, 설명할 게 없다”며 일제히 입을 닫았다.
이번 이 회장의 상고 포기로 검찰·특검·법원 등은 난처하게 됐다. 경영권 승계를 위한 제일모직 등 계열사의 에버랜드 전환사채 실권 등이 배임인지 여부와 관련해 이번 판결로 민사로는 ‘업무상 배임’이 인정됐지만, 형사로는 ‘무죄(무혐의)’로 남게 됐기 때문이다. 2008년 조준웅 삼성 비자금 특검은 제일모직 등에 대한 이 회장 등의 배임 혐의에 대해 무혐의 처분했다. 대법원은 2009년 이 회장의 에버랜드에 대한 배임 혐의 역시 무죄를 선고했다. 경제개혁연대는 “(이번 최종 판결은) 과거 검찰과 삼성특검의 직무유기를 확인해 준 것”이라고 밝혔다.
박태우 김진철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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