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0월 내놓을 전기요금 가격체계 개편안에선 ‘누진제’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전깃불로 환한 서울시내 야경.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경제 쏙] 전기요금 가격 체제 어떻게 바뀔까
최저·최고 구간 누진율 11.7배
다른 나라 비해 요금 증가폭 커
여름 ‘전기요금 폭탄’ 원인
1~2인 가구 비중 높아지면서
서민층 보호 취지도 약해져
누진율 조정폭 따라 희비 엇갈려
개편 논의 때마다 난항 일쑤
10월 개편안도 뜨거운 논란 예상
“기형적 누진율 바로잡는 한편
에너지 복지 실질적 강화 바람직”
전문가들, 취약계층 할인 등 거론
최저·최고 구간 누진율 11.7배
다른 나라 비해 요금 증가폭 커
여름 ‘전기요금 폭탄’ 원인
1~2인 가구 비중 높아지면서
서민층 보호 취지도 약해져
누진율 조정폭 따라 희비 엇갈려
개편 논의 때마다 난항 일쑤
10월 개편안도 뜨거운 논란 예상
“기형적 누진율 바로잡는 한편
에너지 복지 실질적 강화 바람직”
전문가들, 취약계층 할인 등 거론
산업용 요금 인상 여부와 함께 주택용 전기요금의 누진제 개편이 도마에 올랐다. 많이 쓸수록 요금을 많이 받는 누진제는 개편 논의가 나올 때마다 엄청난 저항에 직면해 왔다. 국민들의 요금 체감효과가 가장 큰데다, 자칫 중산·서민층의 부담이 늘어선 안 된다는 여론이 발목을 잡아 왔기 때문이다.
서울 용산구 이촌동에 사는 정순옥(65)씨는 며칠 전 8월분 전기요금 고지서를 받았다. 네 식구인 정씨 가족이 지난달 사용한 전력량은 581㎾h로, 부과된 요금은 19만6710원이다. 지난 3월치 요금(8만2910원·405㎾h)에 견줘 갑절 이상 많다. 정씨는 “지난해 여름 20만원을 훌쩍 넘긴 요금 고지서를 받아본 기억이 있기 때문에 올해는 에어컨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도 평소보다 훨씬 많이 부과됐다”며 울상을 지었다. 해마다 전력소비가 많은 여름철이면 정씨와 같은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이 적잖다. 불만의 핵심은 사용량 증가에 견줘 요금 증가액이 지나치게 크다는 점이다.
이런 요금 인상 효과는 우리나라 전기요금 제도의 누진구조에 따른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치에 견주면 우리나라의 주택용 전기요금은 54% 수준으로 저렴하다. 하지만 누진제가 적용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단순 비교가 어려워진다. 현행 누진 단계는 월 100㎾h를 단위로 여섯 구간으로 나뉘고, 최저 구간인 1단계와 최고 구간인 6단계의 요금 비율(누진율)은 11.7배에 이른다.
새누리당 에너지특위가 지난달 21일 주택용 누진제를 세 단계로 완화하자는 안을 내민 것도 과도한 누진율로 일반가정이 ‘요금폭탄’을 맞는다는 여론을 달래기 위한 차원이 컸다. 그러나 이런 방안은 곧바로 ‘역풍’을 맞았다. 전력 소비가 많은데도 요금 혜택은 많이 받아온 산업용 요금에 대한 거론이 전혀 없었던 데 대한 반발이 깔린데다, 누진율 조정이 서민층의 부담은 늘리고 부자들의 요금은 깎아주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은 탓이다. 오는 10월 정부가 내놓을 예정인 전기요금 가격체계 개편안에서도 ‘누진제’는 뜨거운 논란을 불러올 ‘뇌관’이 될 전망이다.
■ ‘석유파동’으로 도입된 누진제 역사 주택용 전기요금에 누진제가 도입된 것은 1973년 ‘석유파동’을 거치면서다. 그 전까지만 해도 정부는 전기가 남아돌아 ‘체감요금제’를 시행하는 등 특단의 조처를 써왔다. 소비 촉진을 위해 전기를 많이 쓸수록 깎아준 것이다.
원래 누진제 도입의 취지는 일반가정에서 전기를 아껴 쓰도록 하는 동시에, 살림살이가 어려운 서민층을 배려하자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텔레비전 등 전자제품을 가지고 있으면 부유층으로 분류됐다. 소득과 전력사용량이 대체로 비례했다는 얘기다. 조영탁 한밭대 교수(경제학)는 “누진제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전기를 아끼긴 해야 하는데 공장을 멈춰 세워서는 안 되니 각 가정에서 불편하더라도 절전하라는 취지로 만들어진, ‘개발 연대’의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1974년 제도가 처음 도입될 당시에는 누진율(누진구간 및 최저-최고구간 요금 비율)이 3단계 1.6배에 불과했다. 이후로 누진율은 국제유가 수준과 전력수급 여건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했다. 2차 석유파동을 겪은 1979년에는 무려 12단계 19.7배로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1980년대 값싼 원자력발전이 늘면서 누진율은 1989년에 4단계 4.2배로 다시 낮아졌다. 이후 전력수요가 전반적으로 늘어나면서 1995년(7단계 13.2배), 2000년(7단계 18.5배) 개편 과정을 거쳤고, 현재의 누진율은 2004년 이후로 고정돼 있다.
이런 누진율은 일본(1.14배), 미국(1.1배), 중국(1.5배), 대만(1.9~2.4배) 등 누진제를 시행하는 나라들의 누진율과 비교하면 꽤 높은 편이다. 사용량이 적은 구간의 요금은 지나치게 저렴하고, 사용량이 늘수록 요금 증가 폭이 과도하게 벌어지는 맹점을 안고 있는 셈이다.
한국전력공사 관계자는 “지난해 주택용 전기요금 원가(144.9원/㎾h) 수준의 월 사용량은 325㎾h(4만7050원)다. 그 이하는 원가보다 낮게, 그 이상은 원가보다 높은 요금이 부과된다”고 말했다. 전체 가구 가운데 67%의 월 사용량이 300㎾h를 밑도는 수준이라는 걸 고려하면, 저렴한 요금 혜택을 보는 비중이 꽤 크다. 물론 이들 가구도 여름철과 같이 전력수요가 많은 계절에는 사용량이 늘기 때문에 불시에 ‘요금폭탄’을 맞는 대상이 될 수 있다.
■ 누진제 개편을 둘러싼 불편한 진실 누진율 완화 논의가 촉발된 것은 ‘서민층 보호’라는 애초 취지가 많이 약화됐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더이상 과거처럼 전기를 적게 쓰면 빈곤하고 많이 쓰면 부유하다는 식의 잣대를 들이대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전기 사용량이 적은 1~2인 가구의 비중이 1995년 29%에서 지난해 51%로 급증했는데, 이들 가구가 소득 수준과 무관하게 지나치게 값싼 전기요금 혜택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새누리당 에너지특위는 “기초수급자·차상위계층의 70%가 150~400㎾h 구간에 분포돼 누진제로 인한 직접적 피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가전제품 보급이 확대되고, 기후변화에 따른 냉난방 수요가 늘어나는 등의 환경 변화도 고려해야 할 점들이다. 월 300㎾h 초과 사용 가구 비중은 2002년 12.2%에서 지난해 33.5%로 증가했다. 정한경 에너지경제연구원 전력정책연구실장은 “누진율을 완만하게 조정해서 여름과 겨울 등 전력소비가 꼭 필요한 때는 쓸 수 있도록 ‘후생권’을 보장해줘야 한다. 언제까지 무더위에도 에어컨을 끄라고만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으냐”고 말했다.
이런 필요성에도 누진제 개편 논의는 해마다 난항을 겪어왔다. 무엇보다 큰 난관은 행여 중산·서민층의 요금 부담을 늘려 민심을 잃을까 촉각을 곤두세우는 정치권에 있다. 과거부터 전기요금은 흔히 ‘전기세’로 불려왔다. 그만큼 요금 변화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도 높다. 전기요금 제도 개편안이 고위 관료와 국회로 갈수록 번복되는 경우가 빈번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새누리당이 누진율 완화 방안을 제시하면서 1~2단계(200㎾h) 구간은 현재 수준으로 하고, 전력소비가 두드러지게 많은 구간(900㎾h 초과)에 대해서는 요금을 더 많이 부담하도록 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구체적으로 누진율을 조정하다 보면, 그동안 지나치게 낮은 요금을 부과받았던 가구에 대한 요금 인상은 불가피해 보인다. 예컨대 누진 단계가 줄어들게 되면, 1단계 구간 요금을 내던 사람이 2단계와 같은 수준의 요금을 내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 2월 국회에 제출한 누진제 완화 관련 시나리오 예시안을 보면, 3단계 3배 수준으로 바꿀 경우, 월 250㎾h를 쓰는 가구는 4286원씩 더 내야 하고, 350㎾h를 쓰는 가구는 5379원씩을 덜 내게 된다. 조정 폭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릴 수 있어 민감한 대목이다.
이 때문에 계절별로 누진율을 달리하거나 취약계층에 대해서는 필수 전력량에 대한 할인제도를 두는 방안 등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거론되고 있다. 조영탁 교수는 “기형적 구조였던 누진체계를 바로잡는 대신, 에너지 복지를 실질적으로 강화하는 방안을 도입하는 게 바람직하다. 전기요금을 현실화하는 방안과 세제를 통해 소득재분배 기능을 갖추는 것은 분리해서 봐야 하는데, 이를 혼재시켜선 곤란하다”고 말했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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