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케이종합화학의 울산 파라자일렌 공장. 2012년 말부터 지어지고 있는 이 공장은 개정 외국인투자촉진법(외촉법) 관련 특혜 시비에 휘말려 있다. 에스케이 제공
[경제 쏙]
“내 손으로 이 법안을 상정할 수는 없다.”
지난 1월1일 새벽 3시 무렵,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인 박영선 의원(민주당)은 이 한마디를 남기고 국회 본청 406호를 박차고 나왔다. 문제의 법안은 외국인투자촉진법(외촉법) 개정안이었다. 이 법안은 진통을 거듭한 끝에 새벽 5시를 넘겨 통과된 새해 예산안 처리 과정의 최대 변수였다. 결국 외촉법 개정안은 박 의원의 퇴장 이후에야 가까스로 처리됐다.
전날 오전까지만 해도 여야 지도부가 이미 외촉법 처리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법안 처리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박 의원을 비롯한 일부 야당 의원들이 “재벌 특혜이자, 경제민주화에 역행하는 법안”이라며 강경한 태도를 고수한 탓이다. 이번 법 개정의 핵심은 재벌그룹 지주회사의 손자회사들이 외국인과 합작투자법인을 설립할 수 있도록 허용한 데 있다. ‘투자 촉진’이라는 그럴싸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외촉법 개정이 이처럼 큰 파장을 일으킨 데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몇 가지 쟁점들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특정 재벌 기업 특혜 시비 야당 의원들의 반발은 특정 그룹의 편의를 봐준 ‘기형적’ 법안 처리라는 논란이 일면서 촉발됐다. 그동안은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공정거래법)이 정하는 지분 규제에 따라, 그룹 지주사의 손자회사가 외국인과 합작투자법인을 설립할 수 없었다. 증손회사를 두려면 손자회사가 지분 전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런 지분 규제에 발목이 잡힌 그룹은 에스케이(SK)와 지에스(GS) 두 곳이다. 두 그룹 지주회사의 손자회사인 에스케이종합화학, 에스케이루브리컨츠, 지에스칼텍스는 각각 일본 기업과 합작법인 설립을 추진해왔다. 이 합작법인은 증손회사가 되는 것이어서, 손자회사가 지분 100%를 보유해야 하는 규정에 어긋난다.
그런데도 해당 기업들은 법이 개정되기도 전에 공장부터 짓기 시작한 뒤, 사후적으로 입법 요구를 해왔다. 일본 제이엑스(JX)에너지와 합작투자 양해각서를 체결한 에스케이종합화학의 경우, 2012년 말부터 울산 파라자일렌 공장을 짓고 있다. 같은 회사와 합작으로 윤활기유(윤활유의 기본 원료) 공장을 증설한 에스케이루브리컨츠는 이미 지난해부터 공장을 돌리고 있다. 법안 통과를 염두에 두고 일단 전환사채 발행 등의 우회적 방법으로 합작사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2010년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증손회사 지분규제 완화 내용을 포함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통과되는 등의 ‘시그널’이 있었기 때문에 사업을 추진했다는 게 에스케이와 지에스 쪽의 해명이다. 하지만 당시 관련 법 개정안은 법사위 문턱을 넘지 못한 채 폐기됐다.
공장은 다 지어가는데 합작투자 추진은 더디게 되자, 다급해진 기업들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투자를 가로막아서야 되느냐”는 아우성에 정부·여당도 발벗고 나섰다. 지난해 5월 여상규 의원(새누리당)이 외촉법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국회 논의도 급물살을 탔다. 원래는 국회 정무위에서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심의돼야 할 내용이지만, 산업통상자원위에서 외국인 투자 촉진 차원에서 예외 법령을 두는 것으로 하면 법안 통과가 좀더 수월할 것이라는 점을 노린 것이다.
‘특정 재벌을 겨냥한 특혜성 법안’이라는 시비가 인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민주당 김기식 의원은 “특정 재벌을 위해 법적 예외를 두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기업에 적용돼야 할 일반적인 지주회사 제도에 대해 다른 법률에 의한 예외를 허용하려는 입법 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 ‘경제 활성화’ 대표 법안 맞나? 정부·여당은 외촉법 개정안이 ‘경제 활성화’를 촉진하는 대표 법안인 양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 실효성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김진방 인하대 교수(경제학)는 “공장이 들어설 울산과 여수의 지역구 의원들이 주도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대통령이 나서서 전력을 기울였어야 할 법안인지에 대해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업의 투자처는 여러 곳이 있을 수 있는데, 이번 합작투자의 핵심 사업인 파라자일렌(합성섬유의 기초 원료) 공장은 일자리 창출이나 전후방 산업 연관 효과가 미미한 편이라는 것이다. 파라자일렌의 특성상 원료의 대부분을 수입하고, 생산한 제품의 전량을 수출하는 구조인데다 공장 설비가 자동화돼 있기 때문에 일자리도 직접 고용이 50명 수준(공장당)에 불과하다.
증손회사 설립 지분 100% 가져야
일본 기업과 합작법인 추진하던
SK·GS그룹 두 곳 발목 잡혀
SK는 이미 공장 착공에 들어가
“투자 가로막아서야 되느냐” 아우성
‘특정 재벌 특혜성 법안’ 시비 일어 정부·여당 “경제 활성화” 호들갑
“산업연관 효과 미미” 반론도
민주당 “문어발식 확장 유도” 경계
“합리적 규제완화 필요” 의견도 여전히 대기업의 투자에만 목을 매는 근시안적 시각이라는 비판도 뒤따른다.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려면, 대-중소기업 간 투자율의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중소·중견기업에 대한 정책 지원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법으로도 합작투자가 어렵지 않은데 굳이 법 개정에 올인했어야 하느냐는 의문도 나온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자회사인 에스케이이노베이션이 일본 기업과 손자회사를 설립하는 형태로 하면 법을 고치지 않아도 된다. 그룹 내부에서 계열사 간의 이익 공유 비율을 조정하고 외국 합작선을 설득할 방안을 제시하면 되는데, 그룹 총수가 구속 중이다 보니 그런 리더십을 발휘할 조건이 갖춰지기 어려웠던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분을 투자하는 회사(SK이노베이션)와 사업을 수행하는 회사(SK종합화학)가 동시에 나서더라도 합작기업의 이익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준다면, 지분 규제가 엄격한 증손회사를 만들지 않는 선에서 합작을 추진할 수 있다는 얘기다.
■ 지주회사 규제 완화 논란도 재점화 좀더 근원적으로 따져보면, 외촉법 개정 논란의 맨 밑바닥에는 지주회사에 대한 규제 완화를 둘러싼 해묵은 논쟁이 자리잡고 있다. 과거 재벌그룹의 ‘경제력 집중’을 돕는 수단으로 인식돼온 지주회사의 설립이 허용된 것은 1999년 김대중 정부에서다. 기업 소유구조를 단순화해서 기업 경영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자는 취지였다. 다만, 당시에는 경제력 집중을 방지하기 위해 손자회사를 두지 못하도록 했다. 이후 단계적 허용을 거쳐 2007년에 손자회사가 전면 허용되기에 이르렀고, 증손회사도 제한적으로 허용되기 시작했다.
이번 외촉법 개정은 증손회사에 대한 추가적 규제 완화를 의미한다.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을 유도하는 위험한 법안”이라는 민주당의 주장도 이런 규제 완화 흐름에서 나온 것이다. 18대 국회에서는 증손회사에 대한 의무 지분율을 현행 100%에서 상장사 20%, 비상장사는 40%로 낮추는 법 개정이 추진된 바 있다. 김진방 교수는 “지주회사나 자회사의 외부 주주에게는 손자회사나 증손회사의 경영을 감시하고 규율할 수단과 동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기업의 투명성과 책임성은 더 훼손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이에 비해 출자구조가 거미줄처럼 훨씬 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삼성그룹 등 지주회사로 전환하지 않은 기업에 견주면, 에스케이 등이 역차별을 받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일반 지주회사의 금융 계열사 소유를 허용하는 공정거래법 개정 논의에서도 유사한 기류가 있었다. 지주회사로 전환한 에스케이는 금융 계열사를 매각해야 하고 그렇지 않은 삼성은 버젓이 금융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는 상황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김상조 교수는 “증손회사는 예외적으로만 인정하는 게 바람직하지만, 외국인 합작 필요성이 인정되면 열어줄 필요도 있다. 이번 개정안은 사업 연관성을 살피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사전 심의, 합작선의 최소 지분 소유 30% 등 엄격한 요건이 뒤따르기 때문에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부작용을 낳을 소지는 크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에는 지주회사 제도의 장점을 살리면서 규제 수단에서도 합리성을 가미해야 제도 바깥에 있는 기업들의 참여를 독려할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박영선 국제 법제사법위원장(위 사진 오른쪽)이 지난 1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외국인투자촉진법 처리에 반대하며 회의장을 떠나고 난 뒤, 외국인투자촉진법이 의결되자 윤상직(아래 사진 오른쪽)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이춘석 민주당 간사와 악수를 하며 활짝 웃고 있다. 뉴스1
일본 기업과 합작법인 추진하던
SK·GS그룹 두 곳 발목 잡혀
SK는 이미 공장 착공에 들어가
“투자 가로막아서야 되느냐” 아우성
‘특정 재벌 특혜성 법안’ 시비 일어 정부·여당 “경제 활성화” 호들갑
“산업연관 효과 미미” 반론도
민주당 “문어발식 확장 유도” 경계
“합리적 규제완화 필요” 의견도 여전히 대기업의 투자에만 목을 매는 근시안적 시각이라는 비판도 뒤따른다.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려면, 대-중소기업 간 투자율의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중소·중견기업에 대한 정책 지원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법으로도 합작투자가 어렵지 않은데 굳이 법 개정에 올인했어야 하느냐는 의문도 나온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자회사인 에스케이이노베이션이 일본 기업과 손자회사를 설립하는 형태로 하면 법을 고치지 않아도 된다. 그룹 내부에서 계열사 간의 이익 공유 비율을 조정하고 외국 합작선을 설득할 방안을 제시하면 되는데, 그룹 총수가 구속 중이다 보니 그런 리더십을 발휘할 조건이 갖춰지기 어려웠던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분을 투자하는 회사(SK이노베이션)와 사업을 수행하는 회사(SK종합화학)가 동시에 나서더라도 합작기업의 이익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준다면, 지분 규제가 엄격한 증손회사를 만들지 않는 선에서 합작을 추진할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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