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갤럭시탭 대항마로 엔스퍼트에 태블릿피시 대량 주문
판매 부진하자 발주취소, 원자재 400억원어치 폐품화
엔스퍼트·모기업 상장폐지, 2·3차 협력업체들도 ‘휘청’
KT “단말기 결함…과징금 부당”
판매 부진하자 발주취소, 원자재 400억원어치 폐품화
엔스퍼트·모기업 상장폐지, 2·3차 협력업체들도 ‘휘청’
KT “단말기 결함…과징금 부당”
코스닥 상장기업이었던 엔스퍼트는 2009년까지만 해도 ‘070 전용 인터넷전화기’(VoIP) 제조 분야에서 국내 1위를 달리며 연 매출액 800억원을 올릴 정도로 잘나가는 중소벤처기업이었다. 엔스퍼트는 이에 더해 2010년 초 국내 처음으로 태블릿 피시를 개발하며 이른바 ‘벤처 대박’의 실현을 눈앞에 뒀다. 정보통신업계의 큰손인 케이티로부터 기술력을 인정받아 2010년 9월 태블릿 피시 납품계약을 따낸 것이다.
엔스퍼트가 태블릿 피시 제품을 처음 시장에 내놓은 시점(2010년 9월)은 삼성전자의 경쟁제품(갤럭시 탭)보다 3개월이나 빨랐다. 당시 제휴선인 애플의 ‘아이패드’ 도입이 삼성보다 늦어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속을 태우던 케이티로서는 엔스퍼트가 너무 반가운 존재였다. 이창석 전 엔스퍼트 대표는 14일 “케이티가 주문한 1차 물량은 태블릿 피시 20만대(580억원어치)였지만, 구두로 약속한 총 주문량은 150만대로 수천억원어치에 달했다”고 말했다.
케이티의 태도가 돌연 바뀌기 시작한 건, 엔스퍼트가 초도물량 3만대를 납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국내 태블릿 피시 시장이 업체들의 예상과 달리 빠르게 활성화되지 않은 탓이었다. 케이티는 계속 기능 및 사양 변경을 추가로 요구하며 나머지 물량(17만대)의 인수를 늦추더니, 끝내 2011년 3월 일방적으로 발주를 취소해버렸다. 케이티 납품을 위해 은행빚까지 얻어가며 사들인 원자재(400억원어치)가 모두 폐품으로 전락한 엔스퍼트는 부도위기에 내몰렸고, 케이티는 다른 태블릿 피시 모델 제품 4만대를 발주하는 조건으로 17만대 하도급계약의 무효화를 요구했다. 사정이 급한 엔스퍼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요구에 응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뒤 엔스퍼트는 급격히 추락했다. 2010년 매출액이 383억원으로 전년 대비 절반 이하로 줄어들고, 흑자 상태(당기순이익 기록)에서 무려 204억원의 적자로 돌변했다. 2011년에는 더 나빠져 적자규모가 428억원으로 다시 2배 이상 늘어났다. 직원 수는 147명에서 76명으로 격감했다. 엔스퍼트는 결국 2012년 6월 상장폐지 결정에 처해지는 비운을 맞았다.
케이티의 발주취소로 인한 충격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모기업으로 코스닥 상장기업이었던 인스프리트는 엔스퍼트에 지급보증을 서준 여파로 역시 상장폐지됐다. 인스프리트는 한때 국내 소프트웨어 4위 업체로, 연간 매출액 400억원에 육박하던 기업이었다. 엔스퍼트와 거래하던 60여개 2·3차 중소 협력업체들도 200억~300억원의 하도급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연쇄부도 위기에 처했다. 이창석 대표는 “대기업들이 앞에서는 동반성장, 상생경영을 외치지만 뒤로는 부당 발주취소, 기술탈취 등 불공정행위가 여전하다. 거래중단 등 보복이 겁나서 말을 못할 뿐이지, 엔스퍼트와 비슷한 일을 당한 중소기업이 한둘이 아니다”고 말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날 케이티가 엔스퍼트에 태블릿 피시를 주문해놓고 중간에 부당하게 발주를 취소한 것은 하도급거래법 위반(부당 발주취소)에 해당한다며 시정명령과 함께 20억8천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하청 일감을 준 뒤 시장상황 변동 등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발주취소를 하는 것은 가장 무책임한 불공정하도급행위 중 하나로 꼽힌다. 대기업이 발주취소를 할 경우 중소기업은 이미 사들인 원재료나, 만들어놓은 완성품을 활용할 수 없게 돼 부도를 피하기 어려워진다. 국회는 이를 막기 위해 부당 발주취소에 대해서는 피해액의 3배를 보상(징벌적 손해배상제)하는 하도급법 개정안을 지난해 통과시켰다. 케이티는 이와 관련해 “엔스퍼트가 공급한 단말기에 치명적 결함이 있어 발주를 취소했는데도 케이티에게 과징금을 부과한 것은 부당하다. 향후 행정소송 등 법적 절차를 밟을 계획”이라고 공정위의 제재 조처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곽정수 선임기자, 김재섭 기자 jskwak@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