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연장·사업구조 조정…“변화와 소통 지켜봐달라”
백혈병 피해보상·무노조 방침은 요지부동
백혈병 피해보상·무노조 방침은 요지부동
“혼란스럽다. 사태 진전을 지켜보겠다.”
삼성 미래전략실의 이인용 커뮤니케이션 팀장(사장)은 16일 삼성 반도체 공장의 백혈병 피해자 문제에 대한 대응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답했다. 삼성이 지난 14일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요구한 공식사과와 제3의 중재기구를 통한 보상안 마련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중이라고 밝히면서 높아졌던 기대감이 불과 이틀 만에 급격히 식어버리는 순간이었다. 삼성의 입장 선회는 전날 백혈병 피해자를 대표하는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이 심 의원 쪽에서 제시한 제3의 중재기구 대신 직접 협상을 요구한 게 빌미가 됐다.
삼성 백혈병 사태는 올해 들어 삼성이 선보인 일련의 변화 움직임과 맞물려 타결에 이를지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은 삼성의 변화 의지와 사회의 기대 수준 간에 간격이 있음을 보여준다는 평이다.
■ 삼성의 변화 삼성은 지난 1월 신입사원 채용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대학 총장 추천제를 내놓았다. 또 2월에는 직원들의 정년을 현재의 55살에서 60살로 연장하고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총장 추천제는 대학서열화, 지역차별 등 삼성이 예상하지 못한 논란이 확산되자 유보 결정을 내렸지만, 두 사안 모두 1등 기업으로서 사회 변화를 선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삼성의 뜻이 담겨 있다.
삼성은 사업구조 변화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제일모직 패션사업부를 떼어내 삼성에버랜드로 이관했다. 올해 3월 말에는 전자소재 부문만 남은 제일모직과 삼성에스디아이를 합병하고, 4월 초에는 화학계열의 삼성종합화학과 삼성석유화학을 합병했다. 삼성의 변화 조짐은 지난해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장단회의 멤버인 삼성 계열사 사장은 “지난해 7월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을 사장단회의에 초청해 직접 쓴소리를 들은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말에는 “삼성이 국민에게 사랑받는 대표기업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관한 설문조사를 은밀히 벌이기도 했다.
삼성은 경쟁력 강화를 위한 사업조정이나, 당면 현안에 대한 대처일 뿐이라며 특별한 의미 부여를 경계한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만난 삼성 고위 임원들은 공통적으로 삼성의 변화 의지를 강조한다. 미래전략실의 고위 임원은 “우리도 사회가 변했고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문제해결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삼성이 그동안은 경영실적에만 신경을 썼는데, 앞으로는 사회와 소통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삼성 계열사 사장은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올라섰지만 사회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아 굉장히 힘들다. 우리의 소통 노력이 부족한가 되돌아보고, 진일보하는 모습을 보이려 하니 지켜봐달라”고 주문했다. 삼성전자 임원은 최지성 부회장과 장충기 사장 등 미래전략실 수뇌부가 대학 때 운동권 출신임을 거론하며 “돈 버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 요구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래전략실은 비판적 시민단체와도 직접 만나 변화 노력을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 한계와 과제 삼성의 노력은 그동안 사회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긍정적인 변화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삼성의 변화 속도가 아직은 사회의 기대 수준과 비교하면 미흡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은 무엇보다 창업 이래 고수하고 있는 무노조 경영과, 2007년부터 제기된 백혈병 피해자 문제, 2008년 국민에게 약속한 1조원 사회출연 등 같은 핵심적 사안에서 아직 진전을 못 보고 있다. 삼성은 그동안 한편으로는 변화를 시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 비판에 대해 ‘성공한 자에 대한 처벌’이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등과 같은 논리로 방어하는 상충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 삼성의 변화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더욱 강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삼성이 더 과감하게 변화를 보여주는 게 스스로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돈문 삼성노동인권지킴이 공동대표는 “삼성이 백혈병 문제 해결을 8년이 지나도록 늦추면서 사태가 눈덩이처럼 점점 더 커졌다. 삼성의 노조 설립도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도 변화의 한계를 일정 부분 인정한다. 미래전략실 임원은 “변화가 하루아침에 이뤄지기보다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 안팎에서는 이건희 회장 체제의 한계론이 제기된다. 삼성 관계자는 “삼성전자 한 회사에 너무 쏠려 있는 비즈니스 위험과 총수경영 관련 지배구조 위험을 안고 있는데, 이건희 회장 생전에는 지배구조 위험의 근본 해결에 한계가 있지 않겠느냐”고 털어놓았다. 삼성의 근본적인 변화는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승계와 맞물릴 가능성이 높다는 ‘이재용 역할론’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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