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기임원 연봉 공개의 파장이 적지 않다. 삼성전자 등 몇몇 기업의 전문경영인은 수십억원의 연봉을 받는 것이 확인됐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주주들이 임원 자격으로 받는 보수였다. 대표이사로서 고액 연봉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 계열사에 임원으로 이름만 걸어놓고 대표이사의 몇배나 되는 보수를 챙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기업 임원들의 보수는 어떤 근거로 책정되는 것일까? 또 어느 정도가 합리적인 것일까? 연간 5억원 이상의 보수를 받는 기업 등기임원들의 개별 보수가 공개되면서 세계 각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이 사안이 한국에서도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그동안 대기업 임원들이 거액의 연봉을 받는다는 사실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지만 임원 개개인의 연봉은 알 길이 없었다. 자본시장법이 기업에 대해 임원 현황과 그들 전체가 받는 보수 총액만 공개하도록 하고 있던 까닭이다. 실제 2013년 4월1일 SK이노베이션이 2012년 사업보고서를 공시했을 때 최태원 회장을 포함한 3명의 등기임원에게 지급한 보수는 123억원, 임원 1명당 평균 41억원이었다. 최 회장 개인의 구체적인 연봉은 ‘평균’이란 이름의 베일에 가려 있었다. 그러나 자본시장법 개정에 따라 연간 5억원 이상 보수를 받는 기업 등기임원의 2013년치 개별 보수가 처음 공개되면서 베일에 가려져 있던 실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SK이노베이션이 2014년 3월31일 공시한 2013년 사업보고서는 깜짝 놀랄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등기임원 3명의 연봉 총액은 142억원으로 전년보다 약간 늘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최태원 회장의 연봉이 무려 112억원이나 됐다는 사실이다. 최 회장이 임원 자격으로 보수를 받는 곳은 SK이노베이션만이 아니었다.
SK C&C, SK하이닉스, SK(주) 등 모두 5개 계열사에서 2013년 최 회장이 받은 연봉 합계액은 301억원에 이르렀다. 이번에 연봉이 공개된 경영자 가운데 최고액이었다.
최 회장은 특히 2013년 1월31일 법정 구속돼, 이른바 ‘옥중 경영’을 하면서 그런 거액의 연봉을 받았다는 점 때문에 공분을 샀다. 전순옥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지난 4월7일 국회 ‘경제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지난해 최 회장이 받은 연봉은 노동자 평균연봉의 1152배, 시간제노동자 평균연봉의 3865배에 달한다”고 지적했다. 전 의원 쪽이 계산한 바를 보면, 최 회장의 시간당 보수는 1446만원으로 1시간49분 일하고 노동자 평균연봉을 받았다.
2012년 8월 법정 구속돼 제대로 회사 경영을 할 수 없었던 김승연 한화 회장도 거액의 연봉을 받은 것이 사업보고서를 통해 드러났다. 김 회장은 5개 계열사에서 331억원을 받았다. 다만 2012년 경영 성과에 따른 성과급을 제외한 2013년분 급여 200억원을 반납했다고 회사 쪽은 밝혔다. 김 회장의 연봉도 뒷말이 무성했으나 200억원을 반납했다는 점 때문에 눈총은 주로 최 회장에게 쏠렸다.
주요 그룹 총수들 연봉 수백억원
최 회장의 거액 연봉과 관련해 재계에서는 “거액의 변호사 비용을 마련하느라 돈이 필요했던 것 아니냐”는 말이 무성했다. 연봉 공개 뒤 SK그룹은 “최 회장이 2014년에는 계열사의 등기임원에서 빠졌으며 보수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적어도 ‘옥중 경영’을 하면서 고액 연봉을 받는 것이 불합리했다는 점은 인정한 셈이다.
임원 보수 공개 결과 무엇보다 두드러진 특징은, 기업 대주주이면서 임원을 맡고 있는 사람들의 연봉이 전문경영인 출신 임원에 비해 매우 많다는 점이다. 여러 계열사의 임원을 맡은 대주주만이 아니다. 담철곤 오리온 회장은 53억9100만원, 아내인 이화경 부회장은 43억7900만원의 연봉을 받아 부부가 임원으로서 100억원에 가까운 급여를 챙겼다.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은 회사가 427억원의 적자를 냈지만 화학업계 임원 가운데 최고액인 42억4100만원의 연봉을 받았다. 재계 순위 6위인 포스코 정준양 회장의 연봉이 19억5400만원으로 재벌 오너들 앞에서는 명함을 내밀기 어려울 정도였다는 사실과 대비된다.
단순히 임원이면서 대주주라는 이유로 대표이사보다 많은 보수를 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최태원 SK 회장이 SK C&C 이사로 받은 연봉 80억100만원은 정철길 대표이사(10억2300만원) 연봉의 7.82배였다.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이 현대제철 이사로서 받은 연봉 42억원은 우유철 대표이사(11억1500만원)의 3.77배였다. 정 회장의 장남인 정의선 현대차 이사(부회장)의 연봉 18억3200만원은 김충호 대표이사(8억9900만원)의 갑절이었다.
조양호 한진 회장은 한국공항의 이사로서 19억8200만원을 받았으나, 이 회사 대표이사의 연봉은 5억원에 못 미쳤다. 정몽원 만도 이사는 23억8800만원으로 신사헌 대표이사 연봉 (7억4400만원)의 3.2배를 받았다. 등기임원으로 이름만 걸어놓고 대표이사 연봉의 3~7배를 챙겨가는 셈이다. 회사 이익에서 배당을 받는 대주주들이 기업의 임원 자격으로 또 한번 거액의 보수를 챙기는 행태는 어떤 이유로도 납득되기 어려워 보인다.
권오현 대표이사 부회장(67억7300만원) 등 4명의 삼성전자 전문경영인이 받은 거액의 연봉은 ‘샐러리맨 신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됐다. 그러나 이는 특별한 사례에 불과했다. 경제개혁연구소가 1666개 상장사의 임원 보수를 분석한 결과 418개사(25.1%)가 등기임원의 개별 보수를 공개했다. 5억원 이상의 연봉을 받는 등기임원은 전체 상장사 임원 8579명 중 7.46%인 640명이었다. 열에 아홉이 연봉 5억원을 밑돌았다.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연봉 5억원 이상의 임원은 평균 13억6500만원을 받았으나, 전체 임원의 평균보수는 3억9900만원이었다.
‘삼성전자 임원들의 보수는 경쟁사인 애플에 견주면 한단계 떨어진다.’ 이번 임원 보수 공개 결과를 놓고 이런 분석도 나온다. 액수만 놓고 보면 그럴듯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급여와 스톡옵션 수입을 따로 비교하면 이런 분석은 절반만 맞다. 삼성전자 전문경영인 5명의 지난해 평균연봉은 51억5600만원이다. 이에 견줘 애플의 최고경영진 5명의 지난해 평균연봉은 31억1천만원가량이었다. 다만 삼성전자가 2005년 임원 스톡옵션을 폐지한 것과 달리, 애플은 스톡옵션을 경영진 보상의 대표적인 수단으로 쓰고 있다. 2012년 미국증권거래위원회에 공시된 내용을 보면, 로버트 맨스필드 애플 기술담당 수석부사장은 8550만달러를 벌었는데, 이 가운데 스톡옵션 행사이익이 8312만달러(약 900억원)에 이르렀다.
미국 기업들은 최고경영자나 임원의 보수가 높기로 유명하다. 반면 일본 기업 경영자들의 임금 수준은 그리 높지 않다. 일본은 2010년 법을 개정해 1억엔 이상의 보수를 받는 상장사 임원의 개별 보수를 2011년부터 공개하고 있다. 2013년 3월 말로 끝난 회계연도에 3억엔(약 30억7천만원) 이상의 보수를 받은 임원은 모두 10명에 불과했다. 직원 평균연봉에 견줘보면 연봉이 가장 많은 카를로스 곤 닛산 사장(연봉 9억8800만엔)이 141배로 가장 많다. 그러나 연봉 순위 11위인 고나미의 고즈키 가게마사 회장은 직원 연봉의 40.9배인 2억9600만엔을 받았다. 연봉 순위 20위권으로 내려가면 배수가 14배 안팎으로 떨어진다.
외국에선 비등기임원도 연봉 공개
임원 개별 보수 공개는 대주주가 보수 명목으로 회삿돈을 멋대로 챙기지 못하게 하고 임원 연봉이 합리적으로 결정되는지를 주주와 사회가 감시할 수 있게 하자는 뜻에서 이뤄진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번 첫 보수 공개는 제도의 결함을 그대로 노출했다. 무엇보다 임원 보수를 산정하는 근거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문제다. 고정성 급여는 물론이고 성과급이나 퇴직금이 어떻게 산정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돼 있다.
또한 공개 대상을 ‘등기임원’으로 한정함에 따라 대주주나 그 일가가 비등기임원으로 거액의 보수를 받으면서도 공개 대상에서 빠져나갈 길을 열어놓고 있다. 실제로 여러 대주주가 올해 주주총회에서 등기임원직을 내던져 보수 공개 의무를 벗어났다.
외국의 경우 등기임원이냐 비등기임원이냐의 구분은 사실상 없다. 일본은 ‘1억엔 이상의 보수를 받는 임원’은 모두 개별 보수를 공개해야 한다. 보수 공개가 해를 거듭하면서 임원 보수에서 고정성 급여가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고 성과급과 스톡옵션의 비중이 커지는 등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합리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공개제도가 개선되든 제자리걸음을 하든, 임원 개별 보수 공개는 임원 급여가 어느 정도 수준이어야 하느냐를 놓고 앞으로 계속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1986년에 낸 <프런티어의 조건>에서 막대한 임원 보수는 기업 성과와 상관관계가 거의 없고 오히려 조직 내 불화를 조장해 ‘우리’라는 일체감 형성을 저해한다는 이유에서 “최고경영자 같은 고위 경영자의 금전적 보상이 월급이 가장 적은 직원의 20배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지난해 스위스에서는 기업 내부의 최고임금이 최저임금의 12배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방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65.3%가 반대해 부결되기는 했지만 임원의 고액 연봉을 둘러싼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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